[전라도를 팝니다]대담 ‘전라도’를 말하다 
‘5·18 전도사’ 서유진 선생-신선호 이사 대담
“이전 정권 민주주의 후퇴, 튼튼한 전진 기어 넣자”

▲ 지난 19일 메이홀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는 서유진 선생(왼쪽)과 신선호 이사.
 ‘5·18 전도사’로 아시아 전역을 누비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서유진 선생이 최근 잠시 귀국했다. 90년대 초부터 ‘5·18’을 들고 이후 27개 나라를 돌며 5·18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알리고 있는 장본인이다.

 본보는 오랜만에 광주를 찾은 그를 통해 ‘전라도의 자산’인 5·18이 아시아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들었다.

 지난 19일 메이홀에서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 신선호 이사와 대담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자리에선 광주, 전라도 그리고 5·18 얘기부터 6·13지방선거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접근이 이뤄졌다.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우리 사회가 ‘진정한 전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고민할 수 있는 자리였다.
 
 -신선호 이사(이하 신)=이렇게 선생을 뵙게 돼 반갑다. 지금도 ‘여행 중’이실텐데 건강은 어떠신지.

 △서유진 선생(이하 서)=올해로 77세다. 겉으론 건강한데 생각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를 실감하고 있다.

 -신=선생은 평소 ‘여행을 일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여행을 강조하는 이유, 여행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 같다.

 △서=한 군데만 있으면서 ‘같은 사람’을 만나다가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 속에서 ‘다름’을 보았을 때 기존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진짜 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광주에 와서 5·18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그전에는 ‘여행’이 아니었다.

 -신=올해로 5·18이 38주년을 맞는다. 선생에게 5·18은 어떤 의미인가?

 △서=한마디로 한국의 큰 터닝포인트가 1980년 5월의 광주였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군사독재 정권의 종식 계기를 만든 것이다. 군사 문화는 다양성이 배제되고 획일성이 강요된다. 이에 ‘군사 정권’이 이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간절한 소망을 이루게 해준 것이 5·18 광주다. 5·18이 없었으면 군사정권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5·18 당시 나는 (광주)현장에 없었고 미국에 있었다. 미국 외신을 통해 아주 생생하게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듣고 볼 수 있었다.

▲ “윤상원이 없었다면 광주정신도 없었다”

 -신=국내, 광주에서 국내 언론에 대한 통제가 심해 외신을 통해 거꾸로 우리 소식을 듣는 상황이었다. 선생이 미국 국무성 앞에서 학살자 처벌,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도 들려달라.

 △서=박정희 유신 정국에 접어들면서 하루 빼지 않고 미국 백악관, 국무성 앞, 주워싱턴 한국대사 앞에서 군사독재 관련 시위를 했다. 그러다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미국 내 민주화시위도 달라졌다. ‘선통일 후민주’를 외치는 그룹, ‘선민주 후통일’을 외치는 두 그룹이 있었는데 5·18 일어나자 하나로 합쳐졌다. 전두환 군부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데 통일이 먼저냐, 민주가 먼저냐 할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신=5·18이 해외 민주전선을 통합하게 된 계기였다?

 △서=‘큰 임팩트’를 준 것이 5·18이었다. 그런데 광주 사람들이 5·18을 불편해 하는 걸 의외로 많이 봤다. 정말 근대사, 현대사를 통틀어 5·18 같은 역사적 사건은 없었다. 관련해 나는 ‘광주정신’의 태동을 윤상원 열사의 외신 기자회견에서 봤다. 당시 볼티모어 썬 동경 지국장이던 브래들리 마틴이 윤상원 열사와 주고 받은 대화를 똑똑히 기억한다. 1980년 5월28일자 볼티모어 썬 1면 상단 왼쪽에 기사가 실렸는데, 브래들리 마틴은 이렇게 전했다. ‘반란군 눈은 차분했지만 그(윤상원 열사)의 눈동자는 그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윤상원 열사는 ‘지금 이 사태를 진정 시키려면 서울에 있는 주한 미국대사가 광주에 와서 중재를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중재안을 따르겠다’고 했다. 5·18 때 몸을 날린 열사가 수도 없이 많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최후통첩’에도 아랑곳 않고 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전략을 가지고 싸웠던 윤상원 열사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 날 ‘광주정신’도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시아 민주주의 역사서 5·18은 최고의 텍스트”
 
 -신=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단한 광주 5·18’인데 광주 안에서는 불편해하는 분위기를 느꼈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오히려 왜곡되고 가려진 진상, 지역감정에서 비롯되고 탄압 받고 억압받으면서 피해의식이 겹쳐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이 최근 한류의 핵은 다름 아닌 5·18이라고 말씀하셨다. 굉장히 인상 깊었다.

 △서=1993년 광주에 왔을 때다. 광주YMCA에서 ‘해외에서 본 광주’를 주제로 심포지움을 한다고 해서 갔다가 현 시장인 윤장현 ‘5월 성역화를 위한 광주 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처음 만났다. 그때 윤장현 씨가 ‘지역감정, 5·18 왜곡으로 전국화가 힘들다’고 하면서 ‘이걸(5·18)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역류 한 번 시키면 어떨까요’라고 했는데 나도 놀랐다.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밖에서부터 5·18을 가지고 들어오면 광주시민들도 자부심을 느끼지 않겠냐는 거였다.

 윤장현이 또 하나 제안한 게 80년 5월 도청 함락 전날 윤상원 열사 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을 광주로 전부 불러들이자는 거였다. ‘17years later reunion’이라는 프로젝트. 나도 이를 위해 동경에 있는 일본 동경에 있는 외신기자 ‘구락부(클럽)’에 가서 브래들리 마틴을 만나 부탁을 했다. 그 사람들도 ‘That’s great idea’라면서 좋아했다. 광주에 올 때 저널리스트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당시 광주 상황을 메모 형식으로 두장씩 써오라고 부탁했다. 이걸 모아서 낸 것이 ‘외신특파원 리포트’다.

 -신=(5·18을 가지고 아시아로 나가기로 마음 먹고 나선)어디부터 가셨나?

 △서=홍콩에 기반을 둔 아시아인권위원회가 오래 전부터 ‘아시아인권헌장’을 만들려고 광주와 접촉하고 있었는데, 이게 아시아로 나가는 계기였다. 아시아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스리랑카 인권변호사였는데, 그 사람 덕에 스리랑카 가서 첫 ‘작업’을 했다. 그때 가지고 나간 텍스트는 딱 두 가지였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와 광주MBC 오창규PD가 외신 취재 자료와 영상 등을 모아 만든 20분짜리 비디오. 아시아 나라들을 돌며 80년 5월 이야기할 때 비디오를 틀어놓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처럼 좋은 텍스트가 없었다. 비디오를 모든 사람들마다 놀라했고, 울었다. 스리랑카 어떤 노인은 슬리퍼도 없이 맨발로 와서 한국도 아닌 ‘광주를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광주 텍스트’는 아시아에서 사회를 바꾸고 개혁하려는 시민단체, 비교적 진취적이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 틈에서는 아주 좋은 연구 텍스트였다. 태국 쭐라롱꼰 대학이나 탐마삿 대학의 학자들은 그들의 연구 제목이 ‘한국 민주화텍스트’가 될 정도였다.

 -신=그렇게 한 10여 년간 20여 개 나라에서 5·18 역사 배경을 텍스트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을 지원하고 도와오셨다. 지금 아시아의 인권상황은 어떻게 보시나? 올해 5·18 38주년을 맞아 광주 인권상 수상자로 스리랑카 난다나 마나퉁가 신부가 선정되기도 했다.

 △서=제가 활동하던 90년대 후반 2000년대 중반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태국은 군사정권 체제로 제 지인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민주주의나 사회 정의 분야에서 아직 거리가 먼 나라들도 많다. 난다나 신부는 캐톨릭 기반의 인권단체어서 열심히 활동하신 분으로 늦은감이 있었지만 광주 인권상을 잘 줬다고 본다.
 
▲“참여민주주의 성장, 지방정부 능력에 달려”
 
 -신=시대가 한 걸음 진보했지만 기대보단 더딘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촛불혁명은 세계 여러 나라에 놀라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대통령과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서=지난 촛불정국을 보면서 세상에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나와 촛불을 드는 모습에 정말 대단하다고 느겼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렇게 대단한 국민들이 어떻게 이명박·박근혜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신=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탄생한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시나?

 △서=이명박이 ‘다 부자 만들어주겠다’는 것에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이명박이 성공적 기업 사장이었으니까 나라도 회사처럼 빵빵하게 해줄까 하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그건 뭐냐면 소위 탐욕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한 번 만 더 뒤집어졌으면(민주정권의 연장 의미) 한국이 더 나아졌을텐데 오히려 뒤로 쳐져서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하게 됐다.

 -신=지난 촛불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뭘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제가 보기에는 이웃에 대한 발견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광장, 촛불마당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확인한. 또 국민의 이름으로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자신감을 얻으며 그야말로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시대로 가야한다는 과제를 확인한 것 같다.

 △서=적극 동감한다. 방금 말한 것들이 생활하게 돼야 한다. 그걸 할 수 있는 게 지방정부다. (시민들과)직접적으로 가장 가깝게 있는 지방정부의 운영자들이 끊임 없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신=그런 의미에서 광주시장 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도덕성보다 능력, 민주화보다 경제력, 부와 명예, 출세 지상주의라고 하는 이전의 선택 기준과 이번 광주시장 선거의 선택지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서=옛날엔 장관, 차관, 고위 관료했다하면 ‘관록있고 경력 있으니 출중하지 않겠냐’는 선입견을 가졌다. ‘묻지마 능력’. 시민들이 여기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찾는 것이지 ‘기계’를 찾는 게 아니다. 관료 역시 군 생활과 마찬가지로 기본이 ‘상명하복’이다. 창의적인 발상이 쉽지 않다.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전직 차관, 장관을 능력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한 가지 또 강운태 전 광주시장이 ‘인권도시’를 추진할 때 내가 그 참모들에게 역설한 게 있다. ‘광주가 전통적으로 의향이라는 게 있지 않나. 인권도 정의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광주의 브랜드가 정의의 도시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광주가 진화하려면 깊게 박혀 있는 김대중·노무현 말뚝을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주라는 자산이 훌륭한데, 두 전직 대통령의 그늘에 너무 가려져 있다는 의미를 서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들을 넘어야 이 동네는 진화할 수 있다. 앞으로 나가려면 기어를 전진에 놔야하지 않나. 이명박처럼 후진 기어를 넣고 선진화를 부르짓는 건 말이 안 된다.
 
▲“광주는 “선생님”·“노짱” 프레임서 벗어나야”
 
 -신=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전라도, 호남의 전폭적 지지는 계속돼 왔다. 오랜 세월 탄압과 차별, 소외의 탈출구 또는 이를 극복할 어떤 대안체로서 정치인 김대중·노무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선생 말씀처럼 맹목적 지지보단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서=김대중·노무현 두 전 대통령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국민들이 자국 정부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한다. 노무현 정권에선 ‘계급장 떼고 하자’면서 권위주의에 도전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DJ(김대중)는 햇볕정책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노동시장 유연성으로 한국사회 빈부격차가 많이 늘어났다. 소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사실상 재벌과 공동 정부를 세웠다.

 그런데 광주는 이 두 사람에 꽉 쥐어있다. 이 두 사람(김대중·노무현)을 비판하는 순간 불편해 한다. 나는 적어도 광주가 ‘선생님’, ‘노짱’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발전한다고 본다. 그립다, 징징거리는 건 만으론 동네가 바뀌지 않는다.

 -신=끝으로 광주드림이 올해로 창간 14주년을 맞는다. 특별히 ‘전라도를 팝니다’를 주제로 기획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과 함께 광주드림에 대해서도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린다.

 △서=이 나이 먹도록 학위나 돈을 많이 벌거나 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이뤄놓은 게 있다고 젊은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게 있다. 밖에 나가 한 번도 주눅 들어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호남은 역사적, 문화적으로나 심지어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음식, 무엇 하나다 ‘쪽팔릴’ 게 없는 동네다. 기죽을 이유가 없다. 호남이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더 ‘공격적’이었으면 좋겠다.

 전라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전라도민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끌 수 있는 언론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가 사람 냄새가 풀풀날 수 있게 ‘사람 같은 사람’에게 관심갖고 집중하는 것이 언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다. 이 역할을 광주드림이 꾸준히 해줬으면 한다.
정리=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서유진 선생은?

 전북 남원 출신인 서유진 선생은 1980년 미국에 있을때 광주에서 일어난 5·18 항쟁을 들었다. 이후 김대중이 내란 음모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을 때, 현지에서 민주화운동 세력들과 함께 한국의 군사독재 참상을 고발하는 행동을 이어왔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시절엔 한국과 비슷한 처지의 군부독재 국가들을 찾아가 광주의 5·18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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