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소송’ 재판부 피해자 측 증언 들어
징용 끌려가고, 노역장서 당한 고통 쏟아져

▲ 4일 양금덕 할머니 외 4명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당시 아픔을 증언하기 위해 법원을 찾았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제공>
다음 달 1일 선고공판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피해를 당했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당시 아픔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징용 68년 만이다.

 지난 4일 광주지법 제12민사부(이종광 부장판사)는 근로정신대 피해자들과 유족 등 5명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각 2억 원의 배상을 요구한 손해 배상 소송 4차 공판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징용 피해자인 양금덕(84)·이동령(83)·박해옥(83)·김성주(85) 할머니 등이 증인으로 출석, 일본인 학교장의 말에 속아 징용에 끌려가게 된 경위와 비행기 공장에서의 참혹한 노동 실태, 고향에 돌아온 후 일본군 위안부로 오인받아 고통받았던 삶을 진술했다.

 양 할머니는 “1944년 나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일본인 교장의 ‘학교도 보내주고 돈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징용에) 나갔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 후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반대했지만 일본인 교장이 “너가 가지 않는다면 부모님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해 양 할머니는 부모님 도장을 몰래 찍어 일본에 갔다고 증언했다.

 박 할머니는 “우리집에서 언니가 수학선생을 하면서 가족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일본인 교장이 ‘내가 가지 않는다면 언니를 직장에서 짜르겠다’고 협박했다”며 “결국 부모에게도 이를 말하지 못한 채 나고야로 가게 됐다”고 진술했다.

 이렇게 전라도 각지에서 동원된 소녀 138명 등은 여수에서 배를 타고 나고야 미쓰비시 중공업에 도착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이들은 비행기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비행기 부품을 운반하는 등의 일을 했다. 일본인들은 이들에게 습관적으로 매질하고 욕설하면서 일을 시켰다. 1년 여의 강제 노동에 따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양 할머니는 “비행기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을 했는데 신나·페인트가 눈에 들어가 일을 멈추면 폭행을 멈추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계속 일을 해야 했다”며 “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이 지금까지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김성주 할머니는 철판 자르는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렸으며, 이 할머니는 과도한 노동으로 오른쪽 다리를 다쳐 이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다. 노동 환경도 형편 없었고 구타와 욕설이 만연했다. 양 할머니는 “밥은 감자밥에 매실짱아지 2알 아니면 단무지나 된장국을 주곤 했다”며 “잠은 1평 정도의 다다미방에 7명을 몰아 넣어 재웠다”고 진술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 일본은 2차대전으로 인해 공습을 받고 있었는데, 매일 두 차례 이상은 방공호에 대피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기 힘들었다”며 “폭탄이 공장으로 날아오지 않을까 불안한 밤이 계속됐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증언했다.

 이어 할머니들은 1944년 12월 나고야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지진으로 공장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일본인 51명, 한국인 6명이 숨졌다는 것. 양 할머니는 “지진 때 건물 잔해에 옆구리가 찔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된장을 바르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돌아봤다. 김 할머니는 지진 대피하면서 인파에 밀려 귀와 다리를 다쳐 보청기를 쓰게 됐고, 이 할머니는 친구(최정례 씨)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1945년 광복 후 겨우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미쓰비시는 돈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고 자국민에게선 ‘위안부’라는 오해와 함께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양 할머니의 부친은 홧병으로 사망하고 21살에 만난 남편은 10년 만에 이 사실을 알고 집을 나갔다고. 이후 10년 만에 남편은 아들 셋과 함께 나타났지만 그로부터 1년 후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이후 양 할머니는 사람을 피해 광주로 와 생선을 팔면서 근근히 생계를 꾸려왔다고 아픈 삶은 증언했다.

 1980년 일본과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할 때도 한국인들의 편견으로 인한 아픔은 계속됐다. 박 할머니는 근로정신대 소송이 매스컴에 알려진 후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했으며, 이 할머니는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재판에 참석했다. 결국 25년이 걸린 이 소송에서 패소했고 미쓰비시중공업과 17차례에 걸친 협상도 결렬됐다. 다만 당시 일본은 할머니들이 근로자임을 인정해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99엔을 주겠다고 했고, 이에 분노한 피해자들이 이 돈을 일본 대사관 앞에 뿌리며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 날 원고들은 재판정에서 “하루빨리 일본의 사죄를 받고 싶다. 여러분들이 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양 할머니는 “배상금을 받는다면 홧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술 한잔 올리고 싶다”며 “남은 돈으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 한 포대라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배상을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 받은 것이 없다”며 “박정희 정부가 일본 돈을 받아 쓴 만큼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한편 이날 재판에서 미쓰비시 측이 심문을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사실 관계는 이미 드러나 있는 만큼 심문할만한 의미가 없고, 재판부의 법률적 판단만 남은 것 같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의 선고 공판은 다음 달 1일 오후 2시 204호실에서 열린다.

 한편 이날 재판에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등 일본 지원단체와 청소년들이 함께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박슬기(21) 씨는 “당연히 받아야 할 돈도 받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분했다”며 “다음 재판 때 좋은 판결이 내려져 할머니들의 한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호행 기자 gmd@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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