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 중 통방 대화서 `인간적’ 면모 드러내”
“어디 아픈 데 없소?” “바닥이 차니 걸어다니시오”
구명운동 속 마지막날까지 석방 기대하다 죽음 맞아

 34년만에 열린 박흥숙 씨 진혼제에는 관련지인들이 전하는 박 씨의 회고담이 수북했다. 적게는 며칠, 많게는 수개월간 박 씨와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기억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 ‘무등산 타잔’보다 인간 박흥숙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박 씨는 창살 사이로 “형”을 부르고, 처음 옥고를 치르는 학생에게 “아픈 데 없느냐”고 묻는 “따스한 친구”였다.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문승훈 씨는 가장 먼저 박흥숙 사건이 나던 해를 떠올리며 분개했다.

 “1970년대 특히 1977년은 100억불 수출로 우리들을 현혹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과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고통과 그로 인한 아픔들로 인해 이뤄진 것이었고, 그것마저도 100억불이라는 허황된 조명 아래 가려져 있었지요.” 문 씨는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1978년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던 교수 11명이 구속되었던 ‘교육지표사건’에서 교수 석방을 외치다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 해 9월 초 광주교도소에 입감하면서 박흥숙 씨를 만난다.

 “아주 캄캄한 방이었어요. 아주 작은 0.7평정도 되는 공간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고요. 운동을 나왔을 때 박흥숙 형이 수감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같은 영광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9개월 가까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냈습니다.”

 박 씨는 원래 영광 출신으로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살다 생계를 위해 광주로 이주, 당시 거주할 곳이 없어 무등산 덕산골에 열평 남짓한 집을 짓고 살고 있던 가운데 사건이 터진 것이다.

 “키는 나보다 5~10cm 작았지만 운동을 아주 잘했던 기억이 나요. 마른 저보다 다리가 두 배는 됐으니까요. 사법고시 1차도 합격한 상태라는 말을 들었어요. 다부진 체구에 머리까지 좋았더라고요.”

 문 씨는 박 씨와 통방(감옥에서 방과 방 사이 나누는 대화)을 하며 옥고의 외로움을 이겨냈다. 박 씨가 사형당한 1980년 초 문 씨의 수감 생활은 끝났지만 문 씨는 오래도록 박 씨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 ‘섬집 아기’를 기억한다.

 “흥숙 형이 가끔 섬집 아기를 불렀어요. 사실 이 노래의 토대가 된 동화는 끔찍하지요. 섬마을에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아기만 남아있는데, 어머니는 아기랑 먹고 살기 위해 바닷가에 나가 굴을 따요. 아기는 바닷가에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잠이 드는데, 배고픈 까마귀들이 와서 아기를 갉아 먹는 게 동화의 진실입니다. 흥숙 형이 동화의 진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득실대는데, 내년에는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어 박흥숙 씨가 사형 당하기 직전 약 4개월간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김상윤 씨가 운을 뗐다.

 김 씨는 1980년 전남대 학생신분으로 5·18민중항쟁에 참여, 그 해 8월 경 박흥숙 씨가 수감돼 있던 광주교도소로 입감했다.

 “제가 수감된 곳을 ‘벌방’이라고 했어요. 복도 안에 복도를 만들어 다섯 개 벌방이 나뉘었죠. 그 중 가장 끝 방에 수감된 날 어디서 ‘18번, 18번’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웬 소리인가 했어요. 그런데 이어 ‘광주사태로 들어온 사람 아니오?’ 묻더라고요. 당시에는 모두 5·18민중항쟁을 광주사태라고 했으니까요. 그제야 저를 부르는 것을 알았죠.”

 “그렇게 통성명 한 뒤로는 넉 달 가까이 통방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말 많던 박흥숙이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그 뒤로는 일주일을 말을 안하는 거예요. 그저 아프다고만 생각했죠.” 박 씨에 따르면 교도소에서 사형언도를 받으면 3년 안에 집행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김 씨와 박 씨가 만나 4개월 뒤인 12월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두고 사형 집행의 그림자가 철창 밑으로 스며드는 때였던 것.

 “흥숙이는 두려웠던 거지요. 온 몸으로 느껴지는 죽음 때문에 제가 불러도 대답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밖에서는 박근혜 대통령도 서명한 구명운동이 일고 있으니 그 해만 넘기면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을 거예요.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흥숙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묵묵하게 죽음의 긴장감을 견디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던 중 딱 하루 박 씨가 말을 걸어온 일이 있었다. 며칠간의 침묵을 깨고 30여 분 동안 김 씨와 회포를 풀었던 것.

 “교도관들이 ‘그만들 자소’라고 할 때까지 떠들었어요.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렇게 통방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하지만 그 날이 박 씨와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많은 이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박 씨는 1980년 12월24일 사형 집행으로 30년 생애를 마감했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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