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영 할머니 최근 판결 소식 듣고
16일 시민모임 방문
양금덕 할머니 급하게 연락 받고
시민모임 사무실로

▲ 지난 16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에서 광복 후 72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왼쪽)와 양금덕 할머니가 서로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그때 그 친구들 안 죽고 누가 살아있을까 늘 궁금했어. 이제 소원 풀었네.”

1944년 10대 초반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 상봉했다.

17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 따르면, 광복 후 72년 만에 상봉한 주인공은 정신영 할머니(1930년생)와 양금덕 할머니(1931년생)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5월경 나주 초등학교 1년 선후배로 미쓰비시중공업에 강제 동원됐었다.

이번 만남은 ‘필연’ 같은 우연을 계기로 성사됐다.

▲정 할머니 “사진도 찢어버리고 숨어살아”

나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정 할머니가 최근 광주지방법원에서 내린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관련 판결 소식을 듣고 지난 16일 시민모임 사무실(서구 쌍촌동)의 문을 두드린 것.

정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나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다섯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로 끌려갔는데, 기회가 있다면 나도 소송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이어 “광복 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 갔다 왔다고 하면 시집을 가니 못 가니’ 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진도 일부러 찢어버리고 살았다”며 지난 날 심적인 고통을 토로했다.

이어 “가족한테는 아직까지 근로정신대에 대해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다”면서 “오늘도 자초지종 설명 없이 딸한테 광주 사무실에만 데려다 달라고 해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얘기를 나누던 중 시민모임의 주선으로 급하게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1차 소송 원고인 양 할머니가 시민모임 사무실을 찾았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을까. 시민모임은 “두 할머니가 한동안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며 “이 세월의 벽을 허문 것은 의외의 한 마디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 할머니가 ‘가시와야 노부코’란 창씨개명 된 이름을 말하자, 그때서야 양 할머니가 알아본 것이다.

“가시와야 노부코? 그래, 그래! 미나리 농사지었잖아. 알고말고.”(양금덕 할머니)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오메, 살아 있었구만. 이게 얼마만이요!”(정신영 할머니)

시민모임은 “제 이름 석자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빼앗긴 시대, 두 할머니가 빼앗긴 세월의 아픔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이제 소원 풀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자”

서로를 알아본 뒤 정 할머니는 “평생 호미로 땅만 파고 살다보니 전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며 “그때 그 친구들 안 죽고 누가 살아 있을까 늘 소식이 궁금했다. 이제 소원을 풀었다.”며 양 할머니를 다시 힘껏 보듬었다.

양 할머니 또한 “어쩌면 동료들 중 누군가는 한번 만나지 않겠는가 했는데, 안 죽고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얼굴이 고왔는데 늙었지만 그 얼굴이 아직도 남아있다”며 정 할머니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 서로 연락하며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삽시다”라는 다짐과 함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두 할머니. 시민모임은 “길을 나서면서 두 할머니 모두 몸을 돌려 서로를 향해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고 전했다.

한편, 광주지방법원은 지난 11일 김재림 할머니 등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앞서 지난 8일 3차 소송에서도 미쓰비시 측의 법적 배상 책임을 인정,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양금덕 할머니 등 5명이 원고로 참여한 1차 소송도 1·2심 모두 원고가 승소,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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