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진 미국 전달 역할 이태호 기자
지난 16일 고 헌트리 목사 유족 첫 만남

▲ 5·18 당시 참상을 사진에 담은 고 헌트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트리 여사(왼쪽)와 이 사진 일부를 미국으로 전달한 이태호 작가(당시 동아일보 해직기자).
 “제가 그때 그 사진을 미국에 전한 사람입니다.”

 지난 16일 5·18기념문화센터에서 ‘2018광주아시아포럼’ 개막식 행사장 앞에서 고 찰스 헌트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트리 여사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의 이태호 작가다.

 이 작가는 1980년 5월16일 노동절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가 5·18을 경험하게 됐다.

 20일 아침까지 광주에 머물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취재를 시도했지만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된 상태에서 사기가 떨어져있던 터라 “곧 밖으로 ‘탈출’했다”고 털어놨다.

 이날 행사장 앞에서 만난 이 작가는 “당시 이동하는데 운전사들이 굉장히 많이 당했다”고 떠올렸다. “고속터미널까지 가는데 3~4번 검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검문할 때마다 운전사를 때리는 거야. 서라고 했는데 바로 안 섰다고.”

 우여곡절 끝 서울로 돌아갔지만 광주가 자꾸 눈에 밟혔다.

 그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다”며 “결국 다시 광주를 찾았다”고 했다. 광주에 온 그는 5·18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기독병원을 찾아가 당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던 전홍준 의사를 만나 상당히 두꺼운 분량의 사진 자료를 넘겨 받았다.

 사진에 담긴 것은 ‘참상’ 그 자체였다. 심각한 총상으로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간 시신이 셀 수 없었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사망한 이의 모습도 있었다.

 큰 충격과 함께 그는 “이 사진을 어떻게 어디에 전달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누가 찍은건지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는 “사실 물어봐서도 안 됐다”며 “혹시라도 붙잡힐 상황을 대비해 누가 찍은 건지는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말했다.

 사진을 전달할 대상으로 일단 국내외 기자들은 제외했다. 국내 기자는 계엄령에 따른 검열 위험이 컸고, 외신 기자 중에서도 ‘프락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간사였던 그는 가톨릭 노동청년회 본부의 한 신부에게 사진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 신부는 넘겨 받은 사진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 필름채로 옷깃에 숨겨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 사진 숫자가 너무 많아 부피를 줄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 사진들은 이후 해외 현지 언론 보도, 인권·종교단체들의 유인물 등에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가는 최근에서야 이 사진들을 찍은 사람이 고 헌트리 목사라는 걸 알게 됐다. 알고 봤더니 헌트리 목사가 사진을 찍고 현상한 뒤 간호사였던 안성례 알암인권도서관장에 전해졌고, 다시 전홍준 씨를 거쳐 이태호 작가에게 갔던 것이다.

 이 작가는 헌트리 목사 유족이 광주를 방문했다는 소식에 직접 유족을 만나러 광주를 찾았다. 개막식이 끝나고 행사장을 나서던 마사 헌트리 여사는 이 작가를 만나 사연을 듣고는 놀라는 표정으로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5·18 진실을 알리려 했던 자신들을 도와준 이 기자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 기자도 “그때 사진들은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자료였다”며 자신이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헌트리 목사에 대한 감사 뜻을 전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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