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츠페터 기자, 헌트리·피터슨 목사 등 뒤늦게 재조명
5·18 참상 기록·전파하며 진실규명 귀중한 단서 남겨

▲ 5·18민중항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던 푸른 눈의 목격자들. 왼쪽부터 아널드 피터슨 목사,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찰스 헌트리 목사.<피터슨·헌트리 목사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광주를 똑똑히 지켜보고, 기록한 ‘푸른 눈의 목격자’들이 있었다. 전두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만행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진실은 이 ‘목격자’들에 의해 전세계로 번진 뒤였다.

 38년째 이어지고 있는 5·18민중항쟁 ‘진실투쟁’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그들의 헌신이 최근 들어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대표적이다.

 독일 제1공영방송 함부르크 지국의 TV카메라 기자로 입사한 힌츠페터는 1973년부터 독일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중 5·18 소식을 듣고 한국을 찾았다.

 그가 광주에 잠입한 것은 5월20일. 그는 이때부터 23일까지 광주에 머물며 시민들을 무참히 때리고 죽이는 계엄군의 만행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았다. 이 필름은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즉시 보도됐고,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이 안장된 망월동 구묘역 내 추모비.

 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의 원목으로 사역하고 있던 고 찰스 헌트리(한국이름 허철선) 목사도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광주가 기억해야 할 숨은 공로자들

 그는 5·18 기간 거리는 물론 병원에서 죽거나 다친 시민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 사진을 자신의 사택 지하실의 암실에서 현상해 국내외 기자, 종교 활동가 등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시켰다. 현재 5·18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근거 자료가 되고 있는 사진 자료 대다수가 헌트리 목사가 남긴 것들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계엄군에 쫓기는 시민들을 자신의 사택에 숨겨주기도 했다. 일부 사진은 힌츠페터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 힌츠페터 역시 헌트리 목사의 집에 머문 적이 있다.

 기독병원에서 환자 치료를 도우면서 총상 환자의 X-레이 사진을 보고, 이 X-레이 사진과 환자 몸에서 제거한 탄환 파편을 가지고 “사람에게 쏠 수 없는 총탄이다”며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기도 했다.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 총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시민을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이 사진은 고 찰스 헌트리 목사가 찍은 것을 것을 스캔한 것이다.<5·18기념재단 제공>

 1974년 선교사로 한국을 찾아 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아널드 피터슨 목사는 최근 진실규명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계엄군 헬기사격, 전투기 폭격설을 일찌감치 증언했던 인물이다.

 역사학자였던 그는 5월17일부터 26일까지 자전거를 타고 광주 도심을 돌며 현장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면서 5·18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89년 ‘광주 청문회’에 직접 출석해 증언했고, 1995년에는 ‘진상발표회’를 통해 당시 찍은 헬기 사진을 제시하며 계엄군 헬기 사격을 증언하기도 했다.

1995년 광주 망월 구묘역을 찾은 고 아널드 피터슨 목사와 바바라 피터슨 여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80년 광주 증언록인 ‘5·18 광주사태’ 원본.

 피터슨 목사의 수기는 이후 80년 광주 증언록 ‘5·18광주사태’로 만들어졌다. 이 책에서 피터슨 목사는 “한국 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광주)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들었다”고 기록, 지난해 제기된 전투기 폭격설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피신하라” 본국 권유에도 광주 지켜

 헌트리·피터슨 목사는 “피신하라”는 미군 정부의 제안에도 아랑곳 않고, 광주에 남아 진실을 기록하고 남겼다.

1995년 광주 망월 구묘역을 찾은 고 아널드 피터슨 목사와 바바라 피터슨 여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80년 광주 증언록인 ‘5·18 광주사태’ 원본.

 피터슨 목사는 지난 2015년, 힌츠페터 기자는 2016년, 헌트리 목사는 지난해 각각 생을 마감했다.

 이들 모두 눈을 감기 전까지 광주를 그리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터슨 목사는 알츠하이머를 앓은 상태에서도 5·18 당시 끔찍한 고통을 겪은 시민들을 잊지 못해 “광주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집으로 데려와 숨겨주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는 “남편의 눈과 마음은 여전히 광주에 있었다”고 전했다.

 힌츠페터와 헌트리 목사 역시 광주를 잊지 못했다. 특히 두 사람은 죽기 전 “광주에 묻어달라”는 뜻을 남겼다.

 이에 힌츠페터가 세상을 떠난 뒤 같은해 5월16일 5·18기념재단은 보관하고 있던 힌츠페터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했다.

 5·18 38주년을 하루 앞둔 17일엔 남구 양림동산 선교묘원에서 헌트리 목사의 유해 안장식이 진행됐다. 안장식이 끝난 뒤 헌트리 목사의 부인 헌트리 여사는 “남편이 가장 멋진 곳에 묻히게 됐다”며 “이를 통해 광주와 평생 가는 관계가 맺어졌다”고 말했다.
 
▲유족들 38주년 기념식 한 자리에
  
 양림동 선교사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THE 1904’의 홍인화 대표는 “헌트리·피터슨 목사 등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숨은 공로자’들이 너무 많지만, 정작 그분들의 활동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나 헌트리 목사의 활동이 자세히 알려진 것은 불과 1~2년 전이다. 이방인이었지만 광주에 대한 애착으로 진실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이들의 삶을 정리하고 알리는 노력과 시도가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고 아널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왼쪽)와 찰스 헌트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트리 여사. 이들을 비롯한 두 목사의 유족과 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 에들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는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리는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리는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은 광주의 은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 에들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 마사 헌트리 여사, 바바라 피터슨 여사 등 헌트리·피터슨 목사 유족 등이 초청돼 기념식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 힌츠페터의 취재를 도왔던 고 김사복 씨의 아들 김승필 씨도 기념식에 참석해 영화 ‘택시운전사’ 주인공들의 유족간 만남도 이뤄지게 됐다.

 홍 대표는 “5·18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그 진실이 잊혀지지 않게 기록으로 남겼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며 “5·18기념행사는 물론 광주시 차원에서도 5·18이 숨은 공로자들을 기리기 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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