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차 소송에선 피해자들에 화해 불구
이후엔 책임 외면
“우경화·일본 정부와 재계 압박에
판결 이행 못하는 상황”

▲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동원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가 매월 도야마 후지코시 본사 앞에서 후지코시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진행한 문전행동. 후지코시는 최근 도쿄로 본사를 이전해 도쿄에서도 문전행동이 이어지고 있다.<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후지코시는 지금이라도 배상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막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합니다.”

28일 광주를 찾은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동원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이하 호쿠리쿠연락회)’ 나카가와 미유키 사무국장은 “일본 기업이 국가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기들 나름의 판단으로 이 일(강제동원 문제)을 해결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다”고 밝혔다.

이날 광주시 청소년문화의집에서 간담회를 가진 그는 일본에서부터 국내에 이르기까지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피해자와 유족들의 소송 진행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관련 소송은 1992년 일본에서 최초로 시작됐고, 얼마 안되는 ‘승리’의 기록으로 남았다.

특히, 미불임금 문제가 해결된 것은 후지코시 소송이 유일한 사례였다.

일본에서 진행된 1차 소송도 실은 2심까지는 원고들이 패소했지만 당시 원고 단장을 맡은 김경석 씨의 끈질긴 투쟁 등으로 반전을 만들어냈다.

1996년 나고야 고등재판소에서 패소 이후 원고들이 후지코시 회사 앞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고, 후지코시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가 다시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로 끌려간 강덕경 씨 위령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나카가와 사무국장을 비롯한 당시 도야마의 젊은 대학생들까지 투쟁에 동참해 궁지에 몰린 후지코시는 결국 원고들에게 화해를 요구했고,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 원고 승소 판결(화해)이 내려지게 됐다.

이를 계기로 2차 소송이 추진됐는데, 이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호쿠리연락회다.

그런데 2차 소송에서 후지코시의 대응은 완전히 달라졌다. 피해자들에게 화해를 요구했던 것과 달리 2차 소송에선 법률 대응을 이어갔고, 결국 2011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원고들의 청구가 최종 기각됐다.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일본에서의 1차 소송도 실은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며 “당시 화해가 진행될 때 일본 정부 차원의 간섭, 저를 포함한 활동가들에 대한 굉장한 탄압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 전 기숙사 앞에서 군대식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 후지코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녀들.<나카가와 미유키 사무국장 제공>|||||

원래 1차 소송 화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원고단은 사죄비와 시문관고 등을 요구했지만 일본 재계와 경찰 압력 등으로 이는 없던 일이 됐다.
이때 화해 과정에 참여했던 후지코시 사장은 경질 당해 쫓겨났고, 우경화에 따라 일본 여론도 악화됐다는 것이다.

특히, “후지코시는 당시 화해에 나선 전력이 있어 일본 재계나 국가의 압력이 더 심할 것”이라고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밝혔다.

2013년부터 국내에서 소송이 시작된 이후로도 후지코시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잇따르고 있지만 판결 이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다.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후지코시 사장들은 근로정신대 재판 문제에 대해서 ‘재판이 진행 중이라 대답할 수 없다’고 해왔는데 지난해 ‘국가간 문제’라고 말 실수를 한 사장은 1년 만에 교체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지난 18일 1차 소송 항소심과 지난 23일 3차 소송 항소심에서 패한 후지코시는 이미 대법원 상고 입장을 밝힌 상태다.

30일 2차 소송 항소심 판결이 예정된 가운데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30일 판결이 또 하나의 시작이다”며 “이를 계기로 일본 침략의 역사를 바로 잡는 일들을 해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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