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2차 소송 항소심 선고
“거동 불편 못가 아쉬워”
“매년 찾아주는 호쿠리쿠연락회
고맙고 미안해”

▲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오경애 할머니가 옛 사진첩에 있는 초등학교 졸업사진에서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할머니는 1944년 3월 초등학교 졸업해 그 해 가을 무렵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해결이 빨리 났으면 좋겄는데. 질질 끌고만 있고 너무해요 참말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오경애(90) 할머니는 웃고 있었지만 결코 웃는 게 아니었다.

10대 어린 나이로 일본 도야마 후지코시 군수공장에 끌려갔던 때로부터 수십년이 흘렀지만 이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근로정신대라고 TV에 나오면 노인당에서 뭐라고 한 줄 아요? ‘위안부 나온다’고 손가락질 해요. 사람들 마음이 못 쓰겄어.”

지난 28일 서구 양동 자택에서 만난 오 할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와 가끔 교회에서 만나도 맘 편히 이야기한 적 없다고.

“양금덕 씨랑 교회에서 만나서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도 내가 그래 ‘쓰잘데기 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누가 뭐라 할까봐. 나이 90 먹어서까지 ‘위안부’ 소리 듣고 살면 쓰겄소?”

할머니는 일본에 끌려간 때를 1944년 가을 무렵으로 기억했다.

벌써 75년 전 일이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당시의 일이 또렷했다. 광산군에 살았던 할머니는 그해 3월 광주극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큰 애기’는 공출한다고 날마다 잡으러 다니니까 숨어서 살았죠.김치 저장고 만키로 땅을 파 놨는데 거기 숨어 있었어. 그러다 나왔는데 누가 ‘후지와라 게이아이’하고 부르는거여.”

‘후지와라 게이아이’는 할머니가 창씨개명한 이름이다. 할머니를 불렀던 것은 담임 교사.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갑자기 선생님이 자신을 부르니까 ‘무슨 일일까’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이 교사는 다짜고짜 ‘이리와 이리와, 가자’고 했다.

“철딱서니가 없은 게 학교 선생님이 반갑재. 그래서 뭣 모르고 갔는데 나를 살살 데리고 가면서 뭐라고 한지 아요? 면장하고 교장하고 거그(일본)가면 중학교 보내주고, 일본 구경도 시켜준다고. 그때 중학교가 없은 게 (아이들한텐)중학교 가는 게 한 이제. 아그들이 중학교 보내준다고 하면 (일본에)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나죠. 집에 있으면 중학교 못 가고 일만 하고 살 것인디.”

할머니 집에선 난리가 났다.

마침 할머니의 부모님은 다 일을 나가있던 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의 어머니는 할머니 동생들로부터 ‘누가 와서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 부랴 부랴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뭔 일인고 깜짝 놀라서 아버지가 막 면으로 쫓아가니까 이미 데리고 가버리고 없었제.”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는 어떻게든 어린 딸을 빼내고 싶은 마음에 부산으로 떠나기 전 대기하고 있던 송정리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면회는 시켜주지 않았다.

당시를 가을로 기억하는 할머니는 “눈이 많이 와서 다리가 푹푹 빠졌다”고 했다.

“다리가 그렇고 빠지는데 어머니하고 찐쌀, 옷을 싸서 오셨드만. 배멀미하면 묵으라고. (어머니가)면회 시켜주면 보고만 갈란다 해도 소용이 없었어. 그것(찐쌀, 옷)만 전해주고 가더라고 말만 전해들었제.”

지난 28일 자신의 집을 찾은 호쿠리쿠 연락회 나카가와 미유키 사무국장(왼쪽)과 오경애 할머니(중앙)가 지난해 오 할머니를 만난 호쿠리쿠연락회 회원들의 감상문이 담긴 소식지를 읽어보고 있다.<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그렇게 끌려간 일본 공장에서의 생활은 끔찍했다. “일을 잘못하면 뚜뜰겨 맞기도 하고, 어디 올라가다 넘어지고 깨지기도 하고. 매도 맞고. 일본 것들은 회초리로 매를 잘 때려. 그래서 (일본 사람들)없으면 조선말로 욕도 하고 그랬어. ‘후지코시 좋다고 누가 말했나’ 여럿이(다른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서 부르기도 하고.”

배고픔도 달고 살았다. “단무지 한 조각과 된장국 조금만 주면 배고프제. 거그 가가지고 배고프단 소리를 질로 많이 했어.”

해방된 이후에도 고통은 계속됐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로 오해를 받아 결혼이 쉽지 않았다. “중매쟁이 왔다가도 그냥 가버려. ‘일본 가서 일본놈들하고 살다온 년’이라고.”

할머니의 부모님도 속앓이를 해야만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불쌍해. 속이 굉장히 썩었지. 아버지는 나한테 뭐라고 한 사람하고 싸우다가 다리를 다치셔가지고 못 낫고 돌아가셨어.”

할머니는 스무살이 넘어 전 부인과 사별한 남편과 재혼했다. “영감하고 나이 차이가 11년이여. 그런데로 애기들 키우고 가르치고. 여우고. 그러고 살아도…. 고생 무지하게 했어요 나도.”

이런 아픔을 그동안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도 못했던 할머니에게 그나마 위로를 준 것이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 일본의 시민단체,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동원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이하 호쿠리쿠연락회)’다.

약 1년만에 다시 만난 호쿠리쿠연락회 나카가와 미유키 사무국장(왼쪽)과 오경애 할머니가 ‘기념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 오 할머니는 매년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주는 호쿠리쿠연락회에 “고맙고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지난 2014년 이후 호쿠리쿠연락회는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오 할머니 댁을 찾는다. 이날도 나카가와 미유키 사무국장이 할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한 보따리 들고 집을 찾았다.

허리가 아픈 할머니를 위한 파스, 직접 기른 콩으로 만든 된장, 도야마 백화점의 물건, 지난해 5월 할머니를 만나고 간 호쿠리구연락회 회원들이 쓴 감상문이 담긴 소식 등등.

집에 도착한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할머니를 부둥켜 안고 아무 말도 못한채 눈물만 흘렸다.

할머니는 이런 나카가와 사무국장에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또 본인을 돕기 위한 활동으로 정작 일본에선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것에 “미안하다”고 말했다.

30일 할머니가 소송 원고로 참여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선고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있을 예정이다.

할머니는 “직접 가고 싶지만 몸이 좋지 않아 갈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대신 당부했다.

“기왕 이렇게 소송을 해놨으니 언능 해결을 해서 식구들 모두 마음 아프게 안 하고 좀 했으면 좋겠는데. 일본에서 조금 도와줘야 쓰겄는디. 그거 좀 해결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까? 서둘러서 해결 해줬으면 좋겠어.”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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