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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전당 활성화 컨퍼런스 3차] 전고필 총감독 주제발제
넘사벽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광주 문화
전고필
기사 게재일 : 2017-08-30 09:59:14

▲팔도의 곳간에서 문화의 곳간이 되고자 했던 남도

지역은 언제나 변방이었다. 정치적인 소외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취급되었고, 지역민은 하층민 취급을 받았으며, 지역으로부터 생산된 물자는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관리에게 받쳐지거나 세곡선에 실어 중앙으로 보내줘야 했다. 영산강과 서해안을 따라 형성된 각종의 조운창은 그 반증이다.

호남이 흉년이면 팔도가 굶어죽는다 라고 말했던 시대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니 그리 멀지 않은 일이다. 산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그 산이 토해낸 비옥한 평야는 호남을 살찌게 했다. 바다는 가까워 어염시초가 끊기지 않았고, 그 날것을 이리 저리 맛있게 먹을 방법을 궁리하며 맛의 본향으로 남도를 꼽게 되었다. 물산이 풍부하니 삶의 여유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물산에 비해 사람 취급당하지 못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지 못한 한계가 함께했던 것이다. 하니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글조차 모르고 생각조차 깨이지 않는 것은 금수(禽獸)의 일이니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문자속은 알아야 했다. 그런 문자와 함께 발달한 것이 시(詩)와 서(書)와 예(藝)였다. 이렇듯 나름의 자장을 형성한 지역이지만 가혹한 수탈은 끊이지 않았다.

갑오농민혁명은 그런 중앙과 외세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지역의 자존, 백성의 자존을 회복하고자 하는 깃발이었다. 이미 그 오래전 임진왜란이 발발할때도 호남은 제일 먼저 백성 스스로 병사가 되는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김천일, 고경명, 김덕령 등으로 대표되는 의병들은 호남이 철벽처럼 수비가 되니 의병을 끌고 금산으로 진주로 고성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조정을 구하고 백성을 살리고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다. 호남의 의병은 살아돌아오면 의병이 아니었다. 죽어야만 의병이었다.

오합지졸의 정규군이 퇴각만 할 때 그들이 진용을 갖출 수 있는 시간과 물자를 공급하는데 호남의병의 역할은 커다란 역사를 만들었다. 약무호남이면 시무국가라는 이순신장군의 말이 있음이 그나마 위로가 되지만, 못난 조선왕은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전에 당쟁에 눈먼 가신들의 말을 듣고 기축옥사를 통해 호남선비들을 반당으로 몰아 죽이고,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도록 탄압하는 주모자였다.

전국을 흔들어댄 이 참사는 이후 호남인은 중앙정계에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되는 왕건의 차령이남 사람을 등용치 않게한 훈요십조 이후 더욱 커다란 분수령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참담함에도 호남은 왜란이 발발하자 지조 있는 선비와 문사들이 백성의 지원을 받아 비정규군인 의병운동에 지역의 총력을 벌인 것이다.

그런 선비와 문사를 키워낸 도량은 바로 이 지역의 특별한 누정과 원림과 서원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듯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대체 호남의 근원도 모르는 이들이 어느 순간 호남인의 정수리에 대못을 박고 있어서이다. 소아병적인 지역주의나 배타적인 감정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호남의 뿌리 안에 내재된 소외감은 오히려 잘 다듬어서 의리정신의 표상으로, 문화예술의 본향인 예향으로, 맛의 본고장으로 자기 모습을 탑재하여 한반도의 곳간 노릇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충분히 수행할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음이다. 그런데.

▲ 전당을 왜 만들었을까?

문화부분에서 예향으로 곧장 일맥상통하는 지역이 바로 광주다. 물론 목포로부터 발신된 예향이었고, 한편으로는 경상도의 선비문화와 그에 조응하기 보다는 약간 아랫 단계라고 하는 예술의 고장이라는 편견과 왜곡이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광주는 예술의 거리를 가지고 있고, 예술가들이 넘쳐나고, 그중 미술인이 넘쳐나서 광주비엔날레를 개최하고, 디자인 비엔날레를 해걸러서 시행하고, 전국 최초로 영화제를 개최하는 도시이다.

문화로 미래를 살찌게 하겠다는 정책과 지역적 성격이 일치하며 노무현 정부때 삽을 뜬 것이 바로 문화전당 사업이며, 7대문화권 조성 사업이다. 아시아 문화를 탑재하겠다고 했다. 그런 아시아의 혈들이 바다로 대륙으로 흘러오며 내재된 광주는 80년 오월의 피비린내 속에서 생명의 공동체와 결사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를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가장 자유롭게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니 자본 중심, 대량 생산 사회, 첨단 미디어 사회, 파편화된 개별 사회라는 서구적 지향에 모든 것을 물들여 가지 말고, 농경으로 생성된 공동체, 문화의 접변과 접촉 사이의 자장으로 말미암은 문화공동체성, 기계 보다는 손의 위대함과 인간의 영혼을 존중하는 정신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변방으로서 아시아가 아닌 누천년의 역사의 혈이 집중된 이곳 남도의 광주에서 이것을 모아보고, 해체해보고 다시 창조해 보는 일을 벌여가자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는 시작된 것이었다.

곧장 탈서구화와 문화의 탈식민화를 주창하는 것이 아닌 우선은 소멸되어 가는 사회구성체, 민족 공동체 사이에서 그래도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고,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유무형의 유산을 아카이빙을 통해 아시아문화전당의 머리와 같은 정보원에 저장하고, 이를 꺼내서 새로운 문화생산물로 다듬고 제작하며 아시아를 넘어 세계와 공유하자는 것이 창조원과 예술극장의 역할이었다.

거기에 더해 광주의 어린이뿐만 아니라 문화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문화다양성을 체험하고 깊이 경험하며 문화가 단지 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닌 삶속에 내재되고 발현하는 것을 일찍부터 익혀가는 문화의 생비자를 양성하자는 것이 전당의 개념이었다. 더불어 이런 아시아문화의 정수리는 보통의 장소가 아닌 광주를 넘어 세계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 옛 도청 자리로 입지하며, 그곳이 가졌던 장소의 특성을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민주와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마당으로서 민주평화교류원을 설계했던 것이다. 지금은 허울뿐인 것이지만 7대문화권은 이런 모든 문화의 핵이 전당 안에서 담금질해서 외부로 발신될 때 그 가치가 지역내 곳곳에서 경험되고 새롭게 창조되며 시민의 일상에서 문화를 경험하고 생산하고 소비될 수 있도록 구상되었던 것이다.

단군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고 불리웠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은 그럼에도 수많은 난관을 겪어야 했다. 원론적인 부분에서는 과연 문화의 중심이 있느냐에 관한 담론부터, 왜 하필 그 자리냐 라고 하는 장소에 대한 문제제기, 왜 광주만 특별법을 갖느냐라고 하는 타 지자체와 국회의원들의 이의제기와 형평성에 관한 제어, 정권이 바뀌고 모든 역량이 토건공화국으로 바뀔때의 소외, 또 한번의 정권이 바뀌면서 행정적 지위의 격하와 홀대와 경험의 강탈. 결국 전당은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담론은 소멸되고, 개관은 했어도 광주사회로부터 결절된 전당의 운영방식으로 인한 냉대까지 전당에는 바람이 잘 날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삶의 양식을 간직한 문화가 정치로부터 바람을 맞으며 이토록 비루하게 취급 당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전당안의 사람들

필자는 이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라는 공간과 거기에 개입하는 인간, 그리고 흐르는 세월 사이에 무늬들이 바로 문화다. 문화는 터무니와 동의어인 것이다. 그런 아시아문화의 터무니가 전당에는 얼마나 내재되어 있을까?

안타깝게도 전당에서 이런 일을 감당하는 윗사람들은 속된 말로 서구적인 내음이 가득한 이들이 그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아시아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농경과 해양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유목 문화로부터 그리고 그와 연계한 유럽의 문화로부터 해석하고 유럽행 출장을 즐겨했던 이들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반은 미술이었다. 삶의 문화, 생산속의 문화가 아닌 미학적 가치에 기준을 둔 아시아문화전당의 수장들은 비단 정보원 쪽만이 아니었다.

예술극장을 준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한 작품에 20억여원이 투여된 “해변의 아인슈타인”과 같은 작품이 2015년 가을 예술극장에 오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전당의 특별하고 화려한 무대의 이면에는 지역 예술인들의 열패감과 한숨이 가득한 이유를 만들었다.

어쨌든 전당의 개관을 향한 진행은 국가적 관심이 아닌 청와대 쪽의 눈치속에서 이어졌으며, 전당의 최고 지휘자는 전 정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끝내 뽑히지 않고 직무대행이란 체제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당에 파견된 과장급 공무원중에는 문제를 안고 들어오거나 문제를 야기한 이들이 존재했다. 소급해보면 개관을 준비하기 위한 인력 선발에서도 문제는 드러났다. 전당에서 일하고자 열망하는 청년들은 대부분 문화전문대학원 같은 학업을 선택하거나 현장의 일들을 선택하고 기다려왔다.

전당이 주관하는 각종의 인력 양성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니 지역에서 열망하는 이들은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누가 들어갔더라, 외국물 먹은 이들이 많이 들어갔더라, 전라도 사람들은 원적까지 조사해서 숫자를 맞췄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무성했다. 1장에서 한반도의 곳간이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곳 남도는 단순히 밥상의 곳간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더욱 강건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곳이었다. 호남의 인물은 삼성삼평에서 난다고 했었고, 인재는 기고박이라고 했다. 호남 인물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말하는 것이다. 한데 안타깝게도 지금 현직에 있는 전당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역과 소통하고 내 일처럼 지역의 미래, 아시아문화의 미래, 세계 문화의 비전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는 지역사람은 고사하고 외지에서 취업한 이들에게 찾아보기 힘들다. 전당을 운영하기 위해 생성된 그 수많았던 용역들은 광주나 남도에서 이뤄지지 않고 수없이 광주 밖을 떠돌았다. 그 광주밖의 주옥같은 연구가 광주와 전당을 대표하며 공유되고 실행되는 경우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연구와 운영방안에 관한 내용들이 광주와 척을 두고 있는데 전당의 인력들이 광주와 가까워지거나 소통을 위해 안절 부절 못한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다.

누군가 자리에서 내쳐질려는 위험성 때문에 개별 개별 전당에 불만을 품은 현정부와 가까운 사람을 독대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물론 이런 일도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은 하늘도 다 아는 것이다.

광주는 전당 사람들에게 가장 신성한 공간을 내어 주었고, 이제 내어준 것을 후회하고 되찾을려고 한다. 그런데 줄탁동시라고 했는데, 안에서 쪼아주는 병아리가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전당의 일이 전문가들의 들고남이 자유로우며 수많은 일들을 모의하고 저지르는 것일진데 그것을 지역과 도모하지 않아 인적 네트워크가 끊어진 것이며, 아쉽게도 전문가 보다는 직장인들이 전당안에 너무 많다는 것의 반증 아닌가.

전당만 탓할 일은 아니다. 내 자신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개관한 전당이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시민적 역할에 충실했는가도 따져 볼 필요도 있다. 내 돈을 지불하고 전당을 들어가긴 했어도 일천한 지식과 경험으로 인해 나는 전당에서 호명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하긴 광주문화재단에서도 불러주지 않는데 라며 자괴감을 느끼지만, 나의 일과 경력은 광주문화재단이나 전당에서 보기에는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관광을 전공하고 문화의집을 운영하며 전국문화의집의 상임이사를 했고, 대인예술시장의 감독을 4년차 수행하고 있는 나는 전당의 윗분이 위태로운 시기에 독대나 하자고 호명하는 사람일뿐 지역의 일과 국가의 일과 아시아아의 일로부터는 남남인 셈이다.

지금 전당은 광주의 심장을 자기 영토로 한정할 뿐 굳게 닫힌 문을 열고자 오픈 테이블조차 깔지 못하는 자기안의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 있다. 바로 언론이다.

뭇 언론을 통해 전당은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광주에서는 광주문화재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생산하는 뉴스가 곧장 신문지상과 텔레비전으로 전파되는 상황이 된지 너무 오래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있는 나부터 누군가는 이렇게들 일을 열심히 하는군 하면서 오해하기 십상이다. 광주가 빠진, 광주 예술인이 빠진, 광주문화가 빠진 가운데 전당과 문화재단의 천하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 그런 전당을 활용하는 이들

언젠가 전당의 어느 분이 그런 말을 했다. 광주는 예술가들의 민원이 많은 곳이라고.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일들을 위해 정치적 힘을 활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곳이라는 말을 덧 붙였다. 맞는 말이다. 광주시가 돈이 없고, 문화재단이 돈이 없으니 큰 돈줄은 전당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전당에서 펼치는 일들이 대부분 광주는 건너뛰고 이뤄지다 보니 돈많은 곳을 기웃거리다 건수를 잡으면 물고 늘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 한데 뒤집어 보면 광주광역시의 문화수도정책관실도, 광주문화재단의 문예진흥팀도 늘상 그렇게 당해왔다.

신사적이지 못한 것이지만 그렇게 연명하는데 익숙한 이들이 아직도 잔존하는 탓이니 내 얼굴에 침 뱉는 것이다. 언급 안하고 싶지만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 한데 거기에 재미난 것은 전당의 건립에 탄력이 붙을 때 광주의 국회의원들은 전당과 관련된 위원회로부터 비껴 있기 일쑤였다.

물론 엄중한 광주의 미래 때문에 나중에 이 일에 전력투구한 의원이 있긴 했지만 힘이 중심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잇속을 챙긴 정치인도 있었다. 수하의 사람들은 그 안에 자리 잡도록 힘을 보태 주었다. 광주사람, 남도사람이 취직했으니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그런 선택받은 이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눈치 저 눈치를 보아야 했고, 무엇보다 직장으로서 전당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기에 외곽의 사람들은 눈꼽만한 희망도 접어야 했고 오히려 실세인 그들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지역사람들의 입단속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전당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광주의 문화예술 관계 기관과 인물들은 누구일까는 밝히기 어렵지만 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전당 앞을 무시로 다니면서 지원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거나 부끄러운 일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예외의 일들도 발생했다.

광주시가 전당 주변의 활성화와 전당의 방문객 증가, 지역문화의 전당 이입 등을 목적으로 벌이는 격주 토요일 시행하는 프린지 페스티벌에 관람객들이 운집하니 전당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다. 마침 광주시도 전당과 연계해 프로그램을 운영하자는 제안에 급조해서 만든 것이 인터네셔널 프린지 페스티벌이었다. 많은 예산을 투여하고 야심차게 시행하고자 했던 페스티벌은 어느 사이 운영주체가 광주문화재단으로 넘어가고 광주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거리축제가 선보였다.

그렇게 인터네셔날 프린지는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바로 광주시에서 문화재단을 통해 시행하는 프린지 페스티벌이 촌스럽다거나 너무 잦은 개최로 피로하다는 이야기를 야기했다. 더불어 전당 주변의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은 인공호흡기를 달아주어도 시원찮을 지역문화단체 앞에서 전당의 포퓰리즘적인 행태가 오히려 지역 문화생태계의 숨결을 더욱 호흡 곤란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현재도 전당에서는 월드뮤직페스티벌을 전당 앞마당으로 불러 들여 진행중에 있다. 전당 주변의 동명동‘ 산수동 일원은 지가와 임대료가 치솟고, 구시청 사거리, 양림동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생활의 문화와 장르의 예술이 교집합하는 마당이 있어야 한다. 생활문화의 튼실한 기반위에서 시민들은 향유를 넘어 창조적 활동으로까지 진입을 열망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소비로라도 보상을 받고자 한다. 그런데 전당은 참으로 광주와 무감하게 그토록 견고한 벽을 쌓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예술가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다시 또 내부를 보자. 광주는 예향을 넘어 문화수도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문화가 시민의 일상에서 중심이 되는 곳,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문화를 생산하고 매개하는 이들의 위상은 어떠한가.

▲그러니 광주문화의 생태계가 온전하겠는가?

광주의 문화예술인들은 힘겹다. 전국 모두가 심지어 스스로 지방이라고 말하는 서울의 예술인들도 힘겹다. 블랙리스트로 고초를 겪었고, 아직 잔존하는 적폐들의 준동에 또 힘겹다. 각 지역에 들어선 문화재단의 행정 보다 더 서류를 존중하는 인력들이 벌이는 갑질에도 힘겹고, 지원금을 받았어도 이 나라 사람들을 도둑처럼 취급하는 E-나라 도움 시스템이 설상가상이다.

문화를 구매하는 이들은 눈에 띄지 않고 문화의 생산자들은 차곡차곡 늘어 간다. 문화수도가 된다니까 젊은이들은 이 광활한 땅에서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목표를 이쪽으로 두었다가 낭패를 보고 있다. 문화수도 광주로 직결되는 열쇠라 여겼던 광주비엔날레의 조직도 하부의 일하는 이들보다 간부들이 더 많은 현실이고, 실무자를 뽑아도 그 수많은 일들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이직하는 수난의 시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비엔날레에서 이뤄지는 전시장의 설비나 기본 테크닉도 광주에서 제공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모셔오는 실정이며, 비엔날레의 총감독을 지역사람으로 영입해 본 경험이 1995년부터 지금까지 전무하다. 국제적인 전문 인력 하나 양성하는데도 힘을 쏟지 않은 인과응보라 하기에는 찝찝하다. 무언가 음모 같은 것이 있을 성 싶다. 그 음모는 바로 누군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아비규환의 세계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후진을 양성하고 독려하는데 이토록 인색한 사회가 되었다. 어제의 동지들이 밥그릇 앞에서 싸움질을 한다. 누군가는 지역에 충분한 밥그릇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얘기하고, 누군가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고비 때마다 피땀으로 정의를 지키신 분들이 많아서 그러하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외곽의 사람들 이를테면 언론계에 종사했던 이들이 문화부분에서는 유달리 눈에 많이 띈다.

말의 힘, 필력을 지닌 이들이 수많은 언론과의 관계속에서 아성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지만 주변부의 나는 알지 못한다. 그냥 저렇게 많은 경험을 가졌으니 당연한 것일까 하고 생각을 더 깊이 넣지 않는다. 생각하면 뒷골만 땡기는 일이니까 말이다.

광주에서는 프로가 없다고 여긴다. 내 자신은 프로인데 타자는 언제나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관계의 사회망은 늘 주인공이 없는 조연들의 잔치로 전락된다. 광주 비엔날레가 그러한 것처럼, 광주국제영화제가 그러한 것처럼, 김치축제가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광주프린지 페스티벌이 인터네셔날 프린지 한방에 여론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우리는 진득하게 우리 문화의 찰진 온기를 공유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며 성장시키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러면서 개별화된 자신의 것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하니 전당과 같은 거대한 조직과 시설이 들어서도 함께 대응하지 못한다. 함께 준비하고 함께 설비하고 함께 공유해도 모자랄 판인데, 대화를 주고 받을 체널이 없다. 광주시의 문화관련 부서가 전당을 만나는 방식은 무엇일까 곰곰이 지켜보면 현안적인 이들에 집중한다.

물론 각종의 위원회를 통해 지혜를 모으고 들어가지만 이것은 지역의 일이라고 무감하게 반응하기 일쑤다. 거기에 전당의 체급과 시청 직원의 체급이 맞지 않은 것을 가지고 말이 나돈다. 시청의 국장 정도가 와야 전당의 과장이 맞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몇해전 들으면서 참으로 가슴 아픈 기억이 선연하다.

20억여원의 작품을 가져올 수 있는 전당의 위력인데, 적어도 외국에서 공부한 경력 정도는 지녀야 일할 수 있는 조직인데, 이들의 눈에 광주가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누군가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어떤 단체를 초대하자면 그와 등치되는 단체의 눈치를 봐야 하고, 이래저래 창작 지원 같은 것을 요청하면 그것은 지역문화재단의 일인데 라며 외면하고, 이런 전당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복기해보면 전당을 개설해오면서 이렇다 할 전국적 동의하나도 없이 무작정 달려온 것이 커다란 문제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경주가 부산이 서천이 부여와 공주, 전주가 저마다의 수도를 표방하며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물론 다양성 부분에서는 지극히 인정할 부분이다. 하지만 문화의 중심을 자임하며 뛰어든 일이라면 문화예술인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운영을 통해 동의도 구하고 지혜도 얻어오는 것이 시급했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단위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평생을 연구만 해 온 지인은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꽉 채우지 않아서라고 위안을 해 주었다. 그런데 국비는 줄어들고 전문가 보다 직장인이 자리를 버티고 있는 조직에서 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각종의 억압받고,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는 광주의 현실을 가만히 들춰보면 우리는 주인행세를 잘 못하거나 누구나가 서로 나만 주인이라고 했기 때문 아닌가 라는 것과 그것이 혹시 세대간의 소통 통로의 단절과 지역의 인물 품귀 현상 혹은 사다리 걷어차기 같은 것, 정치인의 자기식구 챙기기나 행정과 정치인의 언론 선호 현상으로 인한 지역문화현장의 생태계로부터 벗어난 시야 때문이 아닌가 곱씹어 본다.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나 자신 또한 이 원고를 쓰는데 온 몸의 힘이 다 빠져간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넘사벽을 넘어 지역과 공존하며 아시아문화의 발신지가 되고자 한다면 지역 모든 이들과 끝장을 내는 토론이 필요하며, 현재의 요직 인물에 대한 재조명과 적격한 인사의 시행, 이원화된 문화부 조직과 문화원 조직의 통일, 그간의 극심한 소외를 유발했던 지역 예술인에 대한 신뢰의 회복, 시작도 안한 7대 문화권을 통한 지역문화 생산기지의 개설 및 활성화이며, 그 무엇보다 5월 단체와의 도청복원에 대한 합의가 선행 되어야 할 것이라 여긴다.
전고필 <대인예술시장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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