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4차 혁명시대에도 여전히 옛 것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는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같이 근원적인 것일까. 그렇지만 왜 결국 그것들이 파괴되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해 버리고 마는 걸까.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저 그대로 놔두는 것일까 혹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일상의 분투로 부여된 생명력을 담보로 하는 것일까.

 여러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만났다. 20여 년 전국의 동네와 산골,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멍가게를 그려온 이미경 님의 그림에세이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그림과 글 이미경. 남해의 봄날:2017)이다. 지난 이른 봄에 나온 이 책은 그간 많은 이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단지 옛것에 대한 향수 이상으로 그림이 주는 위로와 삶에 대한 경외를 느끼게 해서 인가…영국 BBC에서도 다뤄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향수 넘어선 위로와 삶에 대한 경외

 “한양수퍼, 복희슈퍼, 덕수상회, 행복슈퍼, 삼거리슈퍼……가게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순리대로 사는 것, 자연스럽게 이치대로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평범한 비밀을 비로소 알게 된거다. ‘그냥 그대로 살라’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 따라, 소박한 구멍가게들처럼 나도 생긴대로 앞으로도 평범하고 순탄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 (‘이름’. 56쪽)

 자연스럽게 이치대로 순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 되어가고, 사방에서 벌어지는 일이 예외 없이 통탄할 지경인 요즘에, 이런 바람은 얼마나 허망하며 또 요원한 일인가 싶다. 무수한 개인들이 선택하지 않은 옛 것들, 느린 것들, 낮은 것들이 먼지처럼 그렇게 뒹굴다 사라져 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무얼하며 달려온 것일까. 단지 겉으로 보이는 물건이나 형태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 깃든 정성,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맘, 느린듯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심지어는 염치까지…우리가 고개 돌려 못 본척하고 내 버려뒀던 그것들.

 그렇지만 글 한쪽 읽고 그림 하나 보고, 또 그림 하나 보고 잔잔히 읊조리는 듯한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차분해 지고 나는 구멍가게에 앉아 따뜻한 보리차 한잔에 고구마를 대접받고 있는 듯하다.

 “눈 덮인 산자락 아래 인적 드문 길가, 나지막한 둔덕 위로 구멍가게가 보인다. 빛바랜 양철지붕은 은백색 옷을 걸치고 한껏 반짝인다...... 마침내 나를 기다리는 그 구멍가게에 다다라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간다. 연탄난로 위 모락모락 보리차와 구운 고구마가 기다리고 있다. 마음을 채우고 가야겠다.” (‘1월의 구멍가게’. 72쪽)

 그래. 결국 함께 할 것은 비틀거리면서도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웃의 손을 잡기. 투닥이면서도 그 안에는 그리워하는 맘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물질과 경쟁, 탐욕으로 지배하는 힘을 갖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양 눈을 희번뜩거리며 살고 있는 어떤 괴물같은 흐름에, 지속적으로 균열내고 어느 한 구석 맑게 지키고 있는 그 모든 안간힘을 기억하기.
 
▲작은책방 아트프린트 소품전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 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 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든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나고 매력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정겨운 구멍가게, 엄마의 품, 반짇고리 같이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수평과 수직’. 138쪽)

 오래된 구멍가게만큼이나 시간을 들이고 펜끝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좀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출판사 ‘남해의 봄날’과 전국의 ‘작은 책방’이 함께 기획한 ‘동전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 작은책방 아트프린트 소품전’이 열리고 있는데, 이번 9월 한달 동안은 광주 동네책방 ‘숨’에서 볼 수 있다. 작지만 아늑한 우리동네 작은책방 한 켠에 전국의 ‘구멍가게’ 여러 채가 들어서 있으니 책방 안이 더욱 정겹다. 책이 출판되고 몇 개월 동안의 반응에 힘입어 이미경 작가의 신작 14편이 추가로 실린 패브릭양장의 한정판 작품집도 발간되어 이번 전시는 더욱 의미가 크다. 가을로 접어드는 이때, 그림 한 장 보고 작품집 넘겨보면서, 어릴 적 보물창고 같았던 우리 고향동네의 그 구멍가게는 어찌 되었을까 추억에 잠겨보는 것도 좋겠다.

문의 062-954-9420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