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남해의 봄날 : 2019)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 중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무려 스무명의 인생이 담긴 책이다. 짧은 한 페이지에는 각자의 인생이야기가 담담히 그러나 진솔하게 적혀 있다. 그저 읽기에는 아주 금방이다. 글 하나에 그림이 몇 장이고, 글자는 읽기 좋게 큼직하다. 하지만 쉽사리 넘길 수가 없어 방금 본 문장을 읽고 또 읽고 잠시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 분의 삶을 가늠해 본다. 할머니들의 삶은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왔던 경험이어서 흔히 짐작가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을 겪었다니 어떻게 그 시간을 살아내신 것일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서 이 책은 어마어마하다.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사는 일만으로도 숨 가빠, 꿈이 있었으나 펼치지 못했던 이들, 할머니가 되어서야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내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순천의 할머니 20명이 들려주는 가슴 먹먹한 감동의 인생 이야기를 이 책에 정성껏 담았습니다. -머릿말 중에서
 
 몇 년 전 곡성의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고 시를 써 ‘시집살이 詩집살이’(곡성할매시인 김막동 외 : 북극곰, 2016) 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다.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칠곡 할매들 강봉수 외 : 삶창,2016)는 칠곡 할머니들의 시집이다. 오랫동안 마을 어르신들과 다양한 작업을 해 온 고창 책마을해리에서는 ‘마을, 숨은 이야기 찾기’(김선순 외), ‘여든, 꽃’(김선순:책마을해리, 2017) 등 어르신 전문문고를 차곡히 쌓아가고 있다. 할머니들과 함께 만든 이런 프로젝트형 책 말고도, 노년의 삶을 위한 다양한 책들이 나와 인생을 마무리 하는 의미를 넘어 길어진 수명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최근에는 글 배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인할매‘(이종은 감독), ’칠곡 가시나들‘(김재환감독) 이라는 다큐영화도 개봉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할머니 전성시대이다. 전 세계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통계 뿐 아닌 사회 곳곳 여러 분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못 먹고 못 배우던 시대의 이야기’가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흔히 지식인이나 전문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책을 내는 일’을 개인들도 쉽게 하는 요즈음, 일반인 그것도 배움이 부족하고 문화 수준이 떨어진 듯 보여졌던 어르신들이 했으니 대단하다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과 노력과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일까.
 
 글을 배우니까 마음이 넒어진 것 같습니다…자신감이 생기니까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한점자)

 평생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행복입니다. (황지심)
 
 할머니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읽는 이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투박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표현에는 삶을 치장하려는 의도도 아픔을 과장하려는 시도도 없다. 어릴 때부터 일하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힘들었던 이야기부터 남편과 시댁에서 설움 받은 것, 자식들을 키우며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지금은 다 잘살고 있노라는 안심 섞인 문장까지, 정갈하게 쓴 손글씨를 따라 읽다보면 왠지 위로가 된다. 아마도 여성이라서 가난해서 겪어야 했던 인생의 질곡을 대단한 결심과 명분이 아니어도 포기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가꿔온 때문이리라.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은 권력이나 돈이 아닌, 생명을 품고 순간을 살아내는 그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줘서 고맙고 반가운 책이다.
문의 062-954-9420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