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변방서 모스크바를 동경하다
광주시립극단이 풀어낸 안톤 체홉 4대 희곡

▲ 연극 ‘세 자매’.<광주시립극단 제공>
 지난 11월말 광주시내에는 한 연극 공연을 알리는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광주시립극단이 제 14회 정기공연으로 안톤 체홉의 ‘세 자매’를 공연한다는 소식을 담은 홍보용 깃발이었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안톤 체홉의 작품, 4대 희곡 중 하나인 ‘세 자매’ 공연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무척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려도 있었다. ‘세 자매’는 총 4막에 이르는 장편인데다 100년이 넘은 작품이고, 한국의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을 가지고 있는 희곡이기 때문이었다.

광주시립극단이 정기공연으로 체홉의 작품을 선정한 이유가 궁금했고, 2019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작품을 풀어서 보여줄지 기대 반 불안 반으로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을 찾았다.

 ‘세 자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희곡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일단 시대적 배경은 제정 러시아 말기다. 장소적 배경은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소도시이다. 이곳에는 포병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주인공 세 자매, 올가, 마샤, 이리나와 안드레이라는 남자형제까지 네 남매는 포병여단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모스크바를 떠나 지방 도시로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남매는 11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아직 살고 있다. 끊임없이 모스크바를 동경하면서.
 
▲네 남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단장이었던 아버지는 없지만 이 남매의 집에는 군인들이 계속 드나들고, 세 자매는 이 사교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세 자매는 안드레이가 대학 교수가 되어 자신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가기를 원한다.

그런데 안드레이는 지방 의회의 말단 공무원이 되고, 누나와 여동생들이 싫어하던 여자와 결혼한다. 그리고 도박에 빠져서 집도 저당 잡힌다. 둘째 마샤는 결혼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임한 중령과 사랑에 빠지지만 군대가 도시를 떠나면서 아픈 이별을 한다.

자신을 연모하여 청혼한 남자와 결혼해서 모스크바로 가려고 했던 막내 이리나는 그 남자가 결투에서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남게 된다. 첫째 올가는 교사 일을 하면서 노처녀로 늙어간다.

 이런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체홉의 ‘세 자매’는 ‘분위기극’이라는 명칭답게 특별한 사건이 없고, 인물들의 행동이 한 목표점을 향해서 달려가지도 않는다. 세 자매와 안드레이, 그리고 안드레이의 부인인 나타샤와, 마샤의 남편 끌리이긴 말고는 모두 군인이거나 하인들이다.

그들은 먹고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고, 등장했다가 퇴장하기를 반복한다. 안톤 체홉을 모르는 사람이나, 그의 희곡으로 만든 무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 2019년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이 무대를 쉽게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광주시립극단은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일단 무대는 공들인 흔적이 보였다. 의상도 마찬가지.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와 그 주제를 보여주는 연기 아닌가.

연기 부분에서 가장 나쁜 것은 발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알기 힘든 연극인데 발성이 안 좋아서 대사를 놓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대사가 들려야 이야기 진행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극이 주려고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텐데, 아름답고 화려한 의상과 무대 장치 속에서 배우들이 자기 멋에 취해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 장면들도 있었다.

 발성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연출 의도였던 것 같다. 연출이 ‘세 자매’를 무대에 올리기로 작정한 순간 무대는 연출의 의도가 빛을 발하도록 꾸며져야 한다. 그런데 이번 광주시립극단의 ‘세 자매’에서는 딱히 그런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희곡, 아직도 세계 어디에선가는 공연되고 있는 작품을 아시아의 작은 나라 소도시에서도 한다는 느낌. 연극인들이 해보고 싶어 하는 작품을 하나 해 본다는 느낌. 명작이고 거작이니 우리도 한 번은 해 봐야지 하는 느낌만을 받았다.
 
▲명작의 연출, 고뇌가 부족했다
 
 만약 생기 없고 지치기만 하는 현실에서 탈주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이루어지기 힘든 욕망 혹은 꿈을 달성하려고 하는 자들의 좌절과 실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것이 연출의 의도였다면 좀 더 과감한 연출력이 필요했다고 본다.

물론 그런 것들을 느낀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것이 덜 전달되었는지 2막 마지막 그 유명한 대사, 이리나의 “모스크바로! 모스크바로! 모스크바로!”가 울려 퍼질 때, 저 대사를 “모스크바! 모스크바! 모스크바!”로 바꾸었다면 이리나의 마음이 관객들에게 좀 더 강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라고 하는 헛된 생각을 했다.

 나상만 광주시립극단 예술 감독은 팸플릿에 이렇게 썼다. ‘이 작품이 21세기의 광주 시민들에게 지루하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랬다.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했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보았던 관객들 여러 명이 그러 소회를 전했다.

하품하는 일이 배우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관객도 있었다. 광주시립극단이 그런 관객들을 고상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양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세계적인 명작을 무대에 올리는 거 환영이다.

단지 하나만 참고해주었으면 한다. 여기 21세기이고 아시아의 작은 지
방도시라는 점. 과거와 현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주려면 그에 맞는 형태와 그 형태를 보여주기 위한 치열한 고뇌가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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