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저와 세계 신석기미술

▲ 〈사진6〉 조선민화 책거리. 19세기. 높이 128.4cm. 일본민예관.
 아놀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창비, 1996)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기하학적 모양을 위주로 하는 장식적 형식주의적 예술은 신석기시대와 더불어 시작한 이래 비상히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지속되었다. 한 예술양식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배한 일은 역사시대에 들어온 이후 어떠한 예술양식의 경우에도-정작 형식주의 자체의 경우에는 더더군다나-다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 바꾸어 말하면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약 500년까지에 이르는 기간이 한 가지 예술양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추상적 형식원리에 지배되어 엄격히 구속을 받는 예술관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 있었던가? (……) 기하학적 모양 중심의 양식이 지배하던 시기의 예술관이 근본적인 동일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비록 많은 지엽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 시대 전체를 일관되게 규정해 주는 단일한 사회학적 기본요인을 반영하고 있다. 즉 경제 활동을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조직화하여 독재적인 지배관계를 수립하고 사회의 모든 정신생활을 종교와 예배 중심으로 영위하는 경향이 그것이다.(23쪽)
 
 어쨌든 하우저는 신석기 미술을 ‘기하학적, 형식주의적’ 예술로 본다. 그는 신석기 미술의 구상 내지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다분히 ‘장식적 예술’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예술을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누려왔다. 그도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우저 같은 세계미술사학자가 보기에 이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대체 왜 이런 벌어진 것일까. 그는 신석기 경제활동을 예를 든다. “경제 활동을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조직화하여 독재적인 지배관계를 수립하고 사회의 모든 정신생활을 종교와 예배 중심으로 영위”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맞지 않다. 이집트 같은 몇 나라를 빼 놓고는 신석기 시대에 ‘독재적인 지배관계를 수립’한 곳은 거의 없었다. 국가의 성립은 한참 뒤의 일이고, 거의 다 ‘원시공산제 사회’에 가까웠다. 이것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씨족부족의 삶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신석기시대의 삶이 ‘종교와 예배 중심’이었다고 하지만 그도 모든 나라가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한반도만 하더라도 신석기시대에 종교가 있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지금까지 나온 유물이나 미술을 보더라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구석기와 신석기를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서양 고고학과 미술사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지이기도 하다. 그들의 신석기 미술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종교’의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관점이 전적으로 맞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우리 한반도 신석기 미술을 볼 때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 민화 책거리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야나기 무네요시’ 전을 연다. 이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 1889∼1961)가 수집한 조선 민화 책거리 두 점이 우리나라에 온다. 〈사진6〉은 그 가운데 하나다. 흔히 이런 그림을 ‘책가도’라 하는데, 책가도는 ‘책거리’와 다르다. 책가도는 중국 책가도병풍 그림을 보고 조선 궁궐 화가들이 따라 그린 그림인데, 책장과 선반에 책과 기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그림을 말한다. 그에 견주어 책거리는 〈사진6〉처럼 책장과 선반이 없이 만병을 중심에 놓고 책갑(冊匣=책 케이스)과 책, 그밖에 여러 기물을 자유롭게 놓고 그린 그림이다. 문제는 이 그림을 ‘책’을 중심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만병(滿甁 찰만·항아리병)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인지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만병을 중심으로, 이 만병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나는, 만병에서 말씀(言=책=진리) 또한 비롯한다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갑골 위상(二)과 말씀언(言)의 기원 문제이기도 해서 여기에 낱낱이 밝히지는 못하고 조선미술사 민화 편을 다룰 때 아주 자세히 논할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민화 책거리를 보고 《민예民藝》(제80호) 지에 〈불가사의한 조선민화〉(1959)를 발표한다. 그는 꽤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 민화를 본 순간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 어디에서 이런 아름다움이 솟아나는 것일까? 이것은 너무 불가사의해서, 솔직히 말하건대, 꽤 안다고 하는 나도 이삼일을 생각다 못해 지쳐 버렸다.
 
 이 민화는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세계적인 미술사학자가 이삼일 동안 집중해서 봐도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는 지쳐버렸다고까지 한다. 그리고 이 책거리 민화를 일러 “매우 독창적이고 다른 나라에서 그 예를 조금도 볼 수 없을 정도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는 한중일에서 ‘세계미술’을 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아주 솔직한 자세이고 태도이다. 그의 말마따나 분명한 것은 세계미술사에 이런 책거리 그림은 찾아볼 수 없다.
〈사진7-8〉 조선 민화 책거리 만병 부분.
 
 〈사진7〉을 보면 항아리 속에 부채와 글을 쓸 수 있는 두루마리가 두 개씩 꽂혀 있다. 항아리 모양을 보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고, 몸통 무늬는 구름(云)을 입체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 항아리는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인 만병(滿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만병은 항아리가 아니라 구름(云)이다. 구름에서 비(雨)가 내리고 그 물(水)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나듯, 바람(風)과 말씀(言) 또한 그 기원은 구름(云)이고, 이 구름은 또 천문(天門)에서 나온다. 그래서 부채와 두루마리가 항아리 아가리(天門)에 꽂혀 있는 것이다.

 〈사진8〉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몸통 위쪽에 있는 삼각형 구름(云)과 비(雨)다. 아직 우리 미술사학계와 민화학계에서는 이 무늬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이 민화 책거리는 19세기 작품인데, 이 무늬의 기원은 자그마치 신석기시대 서울 암사동(기원전 4000년) 빗살무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진9〉 옹관. 경남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유적. 기원전 1400년. 국립중앙박물관. 〈사진10〉 〈사진9〉 옹관을 그림으로 그린 것.
 
 〈사진10〉의 아가리 쪽 무늬와 〈사진8〉 몸통 위쪽 무늬는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 근대사학과 미술사학은 100년 남짓 이 무늬를 ‘삼각집선문’, 다시 말해 삼각형 안에 빗금(線)이 새겨져 있는 무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 삼각집선문이 ‘무엇’을 ‘구상’으로 한 무늬인가이다. 이는 서양미술학자들이 그 구상을 보지 못하고 그저 겉모습만 보고 ‘삼각 띠무늬(triangular band pattern)’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신석기 미술 작품을 보기로 들면서 이 무늬를 삼각형 구름에서 내리치는 빗줄기로 설명했다.

 〈사진9〉 진주 상촌리 유적 옹관은 기원전 1400년인데, 사실 이 무늬의 기원은 기원전 6500년까지 내려 잡고 있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 항아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8〉 19세기 조선 민화 책거리까지의 시간은 자그마치 8300년이나 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세계미술사를 보면 이런 일은 수없이 많다.
김찬곤 <광주대학교 기초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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