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아닌 관념 쪽에 선 사람

▲ 이상.<그림=강현화>
 한 비평가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부터 이상 문학에 대한 감상을 이어가본다.
 
 “지금껏 내가 겨우 밝혀낸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 ‘환각의 인’이 바로 ‘근대인’이라는 사실이 그것. 숲속을 진종일 헤매어도 한 나무의 인상을 훔쳐 오지 못하는 인간, 그가 ‘근대인’이다. 무수한 총천연색의 세계를 단 한 가지 표정(도식, 선, 추상, 관념)으로 사상해버리는 것, 그것이 근대인이며 그가 사는 세계가 바로 근대인 것. 그것이 기차, 기관차, 비행기, 대포, 그리고 미사일을 만든 원리이자 원동력이라는 것. 요컨대 자연(인간, 감성, 생활세계)이 깡그리 박탈당하고 오직 추상적 설계도만 앙상하게, 흡사 해골처럼 남은 세계. 그러기에 그는 자연으로서의 어린아이를 뼈만 남은 童骸로 만들어버렸다. 이 얼마나 섬뜩한 세계이며 공포의 세계인가. 자연으로 이루어진 꽃밭에서 혹은 골목과 가정에서 새소리와 가족의 부대낌과 애환 속에서 살아야 될 아이가 어쩌자고 두 살 적부터 백부 집에 양자로 갔고, 그 속에서 고등공업학교 건축 공부에 나아갔던가. 기하학으로 무장된 이 아이에게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쪽빛과 교과서의 대립이 거기 있었다.” (김윤식, 2005)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인간
 
 ‘환각의 인’은 이상(1910-1937)의 소설 <동해(童骸)>에 들어있는 표현이다. <동해>는 <날개>, <종생기>와 더불어 이상 문학의 3부작의 하나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姙이라 불리는 한 소녀가 ‘나’와 친구 尹 사이에서 벌이는 곡예에 가까운 애정편력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 이상은 이렇게 적었다.
 
 폭풍이 눈앞에 온 경우에도 얼굴빛이 변해지지 않는 그런 얼굴이야말로 인간고(人間苦)의 근원이리라. 나는 울창한 삼림 속을 진종일 헤매고 끝끝내 한 나무의 인상(印象)을 훔쳐 오지 못한 환각(幻覺)의 인(人)이다. 무수한 표정의 말뚝이 공동묘지처럼 내게는 똑같아 보이기만 하니 멀리 이 분주한 초조를 어떻게 점잔을 빼서 구하느냐. (동해, 1936)
 
 이 대목에 처음 주목한 사람은 이상이 죽은 뒤 ‘고(故) 이상의 예술’이라는 추모 글을 쓴 최재서다. 그는 당시 탁월한 비평가였고 영문학계의 동향에도 정통했다.
 
 그는 실로 주관과 객관의 구별을 가리지 않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날개> 주인공의 올빼미와 같은 생활이라든가, 혹은 <동해>에 있어서의 비논리적인 시간관념이라든가-이 모든 것은 꿈과 현실의 혼동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동해>에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중략: 위에 인용한 부분)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이상에게 현실과 꿈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웃을 일이올시다. 그는 현실을 인식치 못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도 알알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적어도 그의 예술에 있어선 대수롭게 알지 않았던 것입니다. ‘날개’에 있어서 금전과 상식과 도덕을 거지반 모욕하다시피 풍자한 것을 보면 그의 예술의 모티브가 나변(那邊: 어느 곳)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예술을 말할 때 이 모티브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이 근본정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은 드디어 어린애의 말장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재서, 1938)
 
 이에 따르면 ‘환각의 인’으로서 이상(혹은 그의 작품 속 자아)은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인간이고, 현실의 인간이 아닌 꿈의 인간이며, 현실 쪽이 아닌 관념 쪽에 선 인간이다.
 
 숲속을 진종일 헤맸다면 수많은 색채와 모양에 대한 인상에 물들어 나왔어야 마땅하련만, 이상은 나무 한 그루의 인상도 훔쳐 내지 못했다. 이를 김윤식은 한마디로 ‘근대인’이라 규정했다. “무수한 총천연색의 세계를 단 한 가지 표정(도식, 선, 추상, 관념)으로 사상(捨象)해버리는 것, 그것이 근대인이며 그가 사는 세계가 바로 근대다”라고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오늘날 사회의 특성은 모든 것을 수량화·계량화하는 것”이라고 현대문명을 비판했다(<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2002).
1937년 2월8일 이상이 아우(김운경)에게 보낸 엽서.
 
▲펴지 못한 날개: ‘근대’
 
 레이첼 카슨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숲에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자양분이 될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들이 현란한 색채와 소리로 꿈틀거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상이 지구의 색깔을 ‘공포의 초록색’이라고 (어느 기행문에서) 부른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왼종일 저 푸른 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권태, 1937)
 
 따라서 이상이 자신의 예술의 모티브를 둔 곳은 ‘초록의 자연’(인간, 감성, 생활세계)이 아니라 기하학(도식, 선)의 세계, 관념의 세계, 추상적 설계도의 세계였다. 그런데 그의 문학에서 이 ‘설계도의 세계’는 ‘섬뜩한 세계’ ‘공포의 세계’와 결합한다.
 
 그는 소설 <동해>에서 자연으로서의 어린아이를 뼈만 남은 童骸로 만들어버린다. 어린아이를 한자로 쓰면 동해(童孩: 아이 동, 어린아이 해). 국어사전에도 나온다. 그런데 이상은 소리는 같되 뜻은 다른 童骸(아이 동, 해골 해)를 작품 제목으로 썼다. 기괴할 뿐 아니라 한자사전에도 없는, 지어낸 말[造語]이다(이상 문학을 깊이 있게 읽으려면 그가 쓴 한자 표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동해> 속 인물인 ‘姙’과 ‘尹’조차 뜯어봐야 한다).
 
 이런 방식은 시 <오감도>(1934)에도 사용됐다. ‘조감도(鳥瞰圖)’에서 획수 하나를 뺌으로서 ‘오감도(烏瞰圖)’로 만들어버린 것, 그럼으로써 암울하고 불길한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상을 독특하다 하는 것은 단지 그가 역설(패러독스)이나 위트 같은 문학적 기법을 탁월하게 구사해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관념으로 바꾸어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특수해 종래의 어떤 방법론과도 구별되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이런 이상의 전략이 우리 문학에서 처음 보이는 것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것은 심리주의이자 문예사조상 모더니즘이었다.
 
 그가 문단에서 활동한 1930년대는 우리 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이 꽃 피운 시기였다. 모더니즘은 철학·미술·문학상으로 기성도덕이나 전통적 권위에 반항하여 자유, 평등, 그리고 시민생활이나 기계문명을 구가하는 사상상, 예술상의 주관주의적 풍조를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미래파·표현주의·다다이즘·초현실주의·주지주의 등을 포괄한다.
 
 한국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의 발흥은 1930년대 경향문학의 쇠퇴와 관련되기도 한다. 문단의 전면에 등장한 ‘구인회’가 새로운 흐름을 대표했다. 구인회는 1930년대 문단의 중견급 신진 아홉 사람이 결성한 문학 친목 단체로 1933년 8월 결성됐다. 순수문학의 가장 유력한 단체였으며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가장 커다란 문학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 김유정, 이상, 김환태 등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쓴 작가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상의 ‘날개’.<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이상 예술의 존재방식: “나는 시체다”
 
 1930년대는 어떤 시대인가. 1929년 10월 뉴욕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심화되고,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대륙 침략을 노골화하며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한국문학에는 카프(KAPF)에 대한 1차 검거 선풍이 불었고, 사회성을 내세운 작품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혹심해졌다. 카프는 1934년 전주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끝내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어 1937년에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 해에 독일공군은 게르니아 학살을 저질렀고, 잇달아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을 시작했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모더니즘은 퇴조하는 프로문학에 뒷발을 걸어 자빠뜨리며 등장했다.” 1930년대의 한국문학이 대체로 순수문학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모더니즘은 그 어원적 의미에 따르면 근대화(modernization)의 경험을 표현하는 모든 문학예술 형식을 가리킬 수 있다. 이론이 그렇다면 모더니즘 문학은 세계시장의 등장으로 박차를 가한 자본주의사회의 성립과 제국주의로의 전화(파시즘)까지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했던가.
 
 사실 모던보이 이상에게 ‘근대’란 현실 너머 관념의 세계였고, 폐기해야 할 ‘19세기’의 대안세계로서 모더니즘(20세기)의 세계였였다(여기서 근대는 현대와 같은 뜻으로 쓴다. 일본에서는 현대를 근대라고 부른다). 그가 오랜 결핵을 앓고 생을 얼마 남겨두지 못한 시점에서, 아니 바로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1936년 가을 제국의 수도 도쿄행을 감행한 것이 결코 뜬금없는 행위였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그곳에서 ‘진짜’ 근대, 진짜 모더니즘을 배우고자 했다. 그런 그가 본 도쿄는 어떠했을까. 가짜이며 모조품이라고, 죽기 두 달 전 마지막으로 김기림에 보낸 사신(私信)에서 적었다.
 
 東京이란 참 치사스러운 都십디다. 예다 대면 京城이란 얼마나 人心 좋고 살기 좋은 ‘閑寂한 農村’인지 모르겠습디다.
 어디를 가도 口味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キザナ(마음에 걸리게도) 表皮的인 西歐的 惡息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分子式이 겨우 여기 輸入이 되어서 ホンモノ(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이 날 일이오.
 나는 참 東京이 이따위 卑俗 그것과 같은 シナモノ(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뭐이 있겠거니 했드니 果然 속빈 강정 그것이오.
 閑話 休題(한화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함)-나도 보아서 來달 中에 서울로 도루 갈까 하오. 여기 있댔자 몸이나 자꾸 축이 가고 兼하여 머리가 混亂하여 不時에 發狂할 것 같소. 첫째 이 깨솔링 냄새 彌蔓セツト(넘쳐흐르는 것) 같은 거리가 참 싫소. (사신7, 1937)
 
 가짜이며 모조품이 아니라, 알고 보니 이것이 근대의 본질이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상이 지식인 특유의 관념적 편향으로 일관한 것만은 사실인 듯싶다. 그가 그리워한 근대는 유클리드 기하학 교과서 속 추상적 공리들이 만들어낸 세계, 태어나 자란 식민지 수도 서울이 보여준 도시화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실미달의 근대였다.
 
 역설적으로, 이상의 예술적 천재성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 속으로 돌파해 들어가지 않고 예술 안에서 인생을 ‘탕진’(이상 자신의 표현)한 철두철미함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생전에 일본에서 국내로 투고한 마지막 작품에서 이렇게 자신의 문학을 완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술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는다.
 
 나는 시체다. 시체는 생존하여 계신 만물의 영장을 향하여 질투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貞姬, 간혹 貞姬의 후틋한 호흡이 내 墓碑에 와 슬쩍 부딪는 수가 있다. 그런 때 내 시체는 홍당무처럼 확끈 달으면서 九天을 꿰뚫어 슬피 호곡한다. (종생기(終生記), 1937)
글=문수현

그림=강현화
 
 [참고문헌]
 김윤식,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문학사상사, 2005
 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문학동네, 2000
 김윤식, 현대문학사 탐구, 문학사상사, 1997
 김윤식·이승훈, 이상문학전집1~4, 문학사상사, 1989-1995
 최유찬, 문예사조의 이해, 작은책방, 2014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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