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남도에선 가을이면 가는 곳마다 주홍빛 감들이 달려있는 나무를 쉽게 만난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빨갛게 달려있는 그 열매들은 묘한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가까운 친척 중엔 농사짓거나 시골에 사는 분이 없는 우리에게조차 그 풍요로움은 전달되어 집안 한 켠 서늘한 곳에 홍시감이 줄지어 앉아 하나씩 익어가고 있다. 그러다 손으로 살짝 만져보며 잘 익은 홍시를 하나씩 가져다 먹을 때면, 백번은 손길이 간다는 농사의 신비를 부드럽고 달게 삼켜 먹는 것은 과연 축복이구나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인간은 먹기 위해 반드시 뭔가를 죽여야 하고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갓난 새끼로부터 어미의 젖을 가로채야만 하는 것. 그러기에 이런 일을 행할 때는 예배드리는 행위처럼 하십시오. 여러분의 식탁이 제단이 되게 하고 그 위에 놓인 산과 들에서 나오는 순수하고 무결한 것이 인간 안에 있는 더욱 순수하고 무결한 것을 위해 드리는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칼릴 지브란,‘예언자’중 ‘먹고 마심에 대하여’, 오강남 역, 현암사 )
 
▲복권 당첨금으로 최고의 만찬 식탁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 까지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여러 일들은 작가들에게 무한한 소재거리가 된다. 일상의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한 면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은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꼭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압축하여 잘 만들어 낸 한 그릇의 훌륭한 일품요리 같다. 대부분 단편집으로 엮어서 출판되는 것이 보통인데,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 명작’ 시리즈는 멋진 일러스트가 어우러져 짧은 이야기 하나를 오롯이 즐길 수 있게 한다. 긴 호흡으로 글을 읽는 것이 점차 어려운 시대에도 문학은 우리에게 여전히 들려주는 보석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시리즈의 다양한 그림들은 곁에서 그런 메시지에 감성을 불어 넣어주어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며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중 덴마크의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대표 단편 ‘바베트의 만찬’(이자크 디네션 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추미옥 역, 문학동네: 2012)은 먹는 것이 주는 은총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품으로, 이 가을에 다시 읽으니 또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바베트는 혼자만 아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전 절대로 가난하지 않아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니까요.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 마님, 예술가들에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 그 분이 제게 말씀하셨죠.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박수를 받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고요. 또 말씀하셨죠.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날 내버려둬 달라는 외침뿐이다.’라고.”>(77쪽)

 소설은 노르웨이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는 두 자매의 시선으로 집안일을 돌봐주는 가정부 바베트에 대해 쓰고 있다. 모든 것을 잃고 시골마을에 살게 된 가정부 바베트가 사실은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였고, 어느 날 엄청난 금액의 복권에 당첨되자 십수년간 함께 지낸 12명의 동네 노인들에게 최고급의 재료로 생전 처음 맛보는 최고의 만찬을 제공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울림을 주는 것은, 단지 먹는 일이지만 그 시간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꼬이고 묵었던 갈등을 털어버리고 마치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다시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고 이 일에 대해 바베트는 복권당첨금을 모두 써버린 것보다 더 중요한 ‘예술가의 일’을 한 것이라고 만족해했기 때문이다.
 
▲본능을 넘어 고귀한 의식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 훗날 이날 저녁을 떠올릴 때, 그들이 그토록 고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 자신들이 지닌 가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66-67쪽)

 단순히 먹고 마시는 본능적인 일인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이 우리 안의 가치를 드러나게 하고 우리 삶을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일상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사느냐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단편소설이 주는 매력은 각 이야기마다 다 다르다. 이제 겨울로 들어서며 분주해 지는 계절, 매력적인 이야기 하나씩 마음에 품을 수 있다면 좀더 풍요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
문의 062-954-9420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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