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밑 구멍으로 물 흐르고 산골 물가 오리도 졸고 있네

▲ 소쇄원 하지 연못을 바라보며 ‘소쇄원 48경’에 실린 뜻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이곳 소쇄원에 심어진 나무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심은 것이 아니라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놓은 풍광입니다. 그래서 김인후 선생께서도 소쇄원48경에서 송석청성(松石天成)이라고 소나무부터 돌맹이까지 하늘이 만든 것이라는 시정을 지어주셨지 않습니까. 특히 ‘제월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가을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맞이할 때, 소쇄처사(瀟灑處士)와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조선 초기 1550년대로 돌아간 듯한 대화가 담양 소쇄원 일각에서 그대로 재연된다. 30일 ‘소쇄처사 양산보와 함께 걷는 소쇄원’ 프로그램에서 ‘양산보’가 된 전남대학교 이향준 박사가 자신의 소쇄원을 김인후를 비롯한 객들에게 소개한다. 소쇄원을 들어서는 초입에 있는 오리와 대나무길, 작은 연못부터 바위, 정자까지 뜻을 품지 않은 바가 없다.

 소쇄원의 풍광을 그린 김인후의 ‘소쇄원48경’ 속 ‘학저면압(壑渚眠鴨)’, 산골 물가에서 졸고 있는 오리도 그대로 재현된다. 양산보는 “세상을 초탈해버린 선비의 세계를 상징하는 기러기를 키우고자 했는데, 계곡이 좁아 오리를 키우게 됐다”며 “살쾡이가 달려들지 않도록 울을 쳐놓았다”고 설명한다. 소쇄원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초입,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좁은 대나무길이 어딘지도 다시 짚어준다. 제29영 ‘협로소황(夾路脩篁)’을 통해 그 모습을 막연히 짐작할 따름이다. ‘눈 쌓인 대줄기 말없이 곧고 구름에 덮인 대끝은 바람에 가벼이 움직이네. 지팡이 짚고 묵은 낡은 껍질 벗기고 띠 풀어서 새 줄기 동여맨다네.’

 소쇄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지와 하지, 2개로 이뤄진 연못이다. 양산보는 “제40영 개울 건너 핀 연꽃을 그린 ‘격간부거’와 제41영 순채싹이 연못에 가득 찼다는 내용의 ‘산지순아(散池蓴芽)’라는 제영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또한 물길이 도달하는 자리에는 물레방아를 용에 비유해 제8영 ‘용운수대’라고 이르렀고, 연못 인근에 놓인 오동나무는 여름그늘을 지내기 위해서라는 제37영 ‘동대하음(桐臺夏陰)’으로 그려졌다.

 “담장 밑에 있는 구멍으로 물이 뚫고 흐르는구나, 라는 뜻으로 제14영의 원규투류(垣竅透流)라는 사자구절이 나왔잖습니까. 여기도 그저 오랜 세월이 지났다면 여름의 거센 물길에 무너지고 말았을 터인데, 소쇄원의 자연격물들이 물길을 막아주어 시간이 감에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소쇄원에 계단처럼 깔린 너르고 평평한 두 개의 바위들을 두고도 양산보는 이와 같이 설명한다. “제13영 광석와월(廣石臥月)이라 넓은 바위에 누워 밝은 달을 쳐다보느라 밤을 세고, 제22영 상암대기(床巖對棋)로 평상 바위에서는 바둑을 두기 좋다고 하셨지요. 앞으로 어린 도령들은 문중에 서가를 뒤져 48영을 모두 외워 오도록 하세요. 다음번엔 시험을 보겠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자는 제월당으로 주인이 거처하던 곳이고, 그 아래 광풍각은 객이 거처하던 곳이다. 특히 제월당 앞에는 양산보의 형이 선물한 파초가 식재돼 있었으나, 관광객들이 방문하며 손을 타 죽어간 탓에 뒤뜰로 옮겨졌다. “그러나 노래해주신 시정은 남아있습니다. 제43영 ‘적우파초(滴雨芭蕉)’라, 빗방울이 떨어지는 파초의 멋들어진 모습은 여전하지요.” 제 43영에 남아있는 파초의 형용은 이렇다. ‘빗방울이 은촉처럼 어지러이 떨어지고 파초는 푸른 비단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네. 고향을 떠올리는 소리보다 못하지만 적막함을 그치게 하니 되려 좋구나.’
양유진 기자 seoyj@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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