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아들 안호재 씨가 대신 전한 안 치안감 메시지
“박관현 옥사 소식에 아파하셔, 광주 원망 않았다”

▲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유족 셋째 아들 안호재 씨는 10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유품 기증 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안 치안감이 광주시민들에게 남긴 말을 대신 전했다.
“아버님(안병하 치안감)은 힘이 약해 더 이상 시민을 지키지 못함에 죄송스러워 했습니다.”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유족 셋째 아들 안호재 씨는 10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유품 기증 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안 치안감이 광주시민들에게 남긴 말을 대신 전했다.

안 씨는 “아버님은 광주를 원망하지 않고 광주시민을 이해했다”며 “강제해직되고 사망시까지 광주를 찾지 않았던 이유는 고문후유증으로 장거리 여행이 힘들었고, 당시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전남 치안책임자였지만 힘이 약해 더 이상 시민을 지키지 못함에 죄송스러워했다”며 “(1980년)5월16일 광주학생들의 평화적 야간 횃불시위를 감사하게 생각했고, 나중에 박관현 회장이 옥사했다는 소식에 몹시 마음 아파하셨다”고 전했다.

또 “5월21일 경찰이 대피할 때 옷을 주고, 밥을 주고, 심지어 잠자리까지 내주면서 경찰을 보호해준 시민들파게 감사해 했다”고 말했다.

이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안 치안감의 ‘비망록’을 기증한 것과 관련해 안 씨는 “아버님은 88년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가족들 안전을 생각해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을까 많은 부담을 가지고 계시다 88년 10월 돌아가셨다”며 “5·18 당시 계엄군만 투입되지 않았으면 자체 병력으로 광주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에 크게 아쉬워하셨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 함께 참석한 안 치안감의 부인 전임순 여사도 1980년 5월19일까지 광주에 있으면서 안 치안감에 듣거나 직접 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전임순 여사는 “5월18일 아침 군인들(공수부대)이 차에서 내리자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고 곤봉으로 마구 때렸다”며 “차에서 고개만 들어도 머리를 마구 때리기도 해 이것은 너무나 아니다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남편으로부터)그날 부상자가 몇백명이 된다고 들었다”며 “광주가 외부와 차단돼 상부에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리라 생각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5월21일 광주로 내려가겠다는 말에 ‘여기가 어디라고 내려오겠다고 하느냐’는 말에 광주사태가 심각해졌음을 알았다”고 밝혔다.

5월21일 이후 안 치안감과 연락이 두절되고 전 여사는 5월26일 전화 통화로 ‘서울로 출발한다’고 들었지만, 안 치안감은 집에 오지 못했다.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것이다.

안호재 씨는 기자회견을 마치면서 지난달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낸 것 관련해 “5·18 37년만인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아버님은 명예를 회복했지만, 유족들은 아직도 30여 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문 대통령이 아버님 명예를 지켜주셨듯 이번에는 국민이 저희 가족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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