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투쟁을 이어갔던 수많은 언니들

 80년대 마지막 학번인 나는, 학생운동의 정서는 경험하면서도 목숨까지 걸 만큼 치열한 운동의 현장에는 있지 않았다. 그것이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고 또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아무튼, 시간은 흘러 청춘을 보내고 열정과 기억도 희미해져 갈 때, ‘독재자의 딸’이 정권을 잡고 국정농단을 하는 시대를 사는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고, 그러다 몇 년 뒤 겨울 내내 어둠을 밝힌 촛불혁명으로, 잊혔던 과거와 묻어 두었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겠구나 했다. 그러다 ‘영초언니’ (서명숙. 문학동네:2017)를 만났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스스로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고 호적에 ‘빨간줄’이 그어지는 걸 감수하겠다고 각오한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꾼의 자세를 견지할 자신도 없었다. 그 어느 쪽도 내가 결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76쪽)

 유신시대를 살아낸 언니들은 자신의 결심과는 상관없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함께 소용돌이 쳤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위대하게 혹은 은밀하게 삶을 이어가는 고민과 투쟁은 계속되었고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그리고 수많은 죽음과 투쟁을 거쳐 결국 지금의 촛불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꽃잎처럼 스러져 간 이들이 얼마나 많으며 잊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특히나 여성들은 목숨을 걸고 함께 고민하고 투쟁했음에도 또 다른 면으로 생활을 책임지고 아이를 키우고 뒷바라지도 하는 이중고와 함께 어느새 보조자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영초언니’들이 그랬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더욱 뼈져리게 느꼈다. 잘 모르던 언니들의 이야기가, 그 청춘의 시절이, 너무도 아프고 또 아름답구나 싶었다.

 “우리 열명이니 가라열이 어떨까요? 가라! 여성 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 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 뭐든 다 되잖아요?” 이렇게 고려대 내에 읽고 생각하고 떠드는 여학생들의 모임 가라열이 조직되었다…가라열에는 남학생들이 주도하는 여느 서클이나 단체처럼 엄숙한 선후배의 위계질서도, 간부 중심의 리더십도 없었다. 선후배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했고, 모두가 간부요 회원이었다…유신체제하의 대한민국은 ‘겨울공화국’처럼 점점 얼어붙어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가라열을 통해 어둠이 짙은 만큼 새벽도 머지않았다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뜨거운 청춘, 아름다운 젊은 날이었다. (57-59쪽)

 나에게도 떠오르는 언니가 몇 몇 있다. 눈 따갑고 목 아프게 집회를 마친 다음날 교정 어느 구석 벤치에서 무심하게 툭 뱉듯이 서로 고민을 나누던, 몇 번 만나진 못했지만 늘 선봉에 서서 손목에 묶은 손수건을 휘날리며 구호를 외치던, 학교 앞 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 서점 사장님에게 인사시켜주고 어떻게 ‘그 책’을 찾아가면 되는지 알려주던, 1200원짜리 계란라면을 사주며 후배를 챙겨주던 언니, 언니들. ‘영초언니’는 냉혹한 시대를 살아낸 우리나라 가슴 아픈 현대사에서 누구에게나 함께 했던 그 ‘언니’들의 대명사구나 싶었다.

 지난 토요일(5월19일) 오후 동네책방 숨에서 열린 북토크 ‘광주로 다시 온 영초언니’에서는 이 책을 만든 문학동네의 이연실 편집자와 함께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작가가 아닌 편집자에게 듣는 뒷이야기가 더해져 무척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이야기가 계속 되면서 참석자들은 광주의 오월과 민주화운동을 통해 새겨진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소감을 나눴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무척 자연스러운 자기고백의 시간이었는데,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과거의 경험들이 서서히 봉인해제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대가 바뀌긴 했다는 말이 여러번 나왔다. 아마도 이 책이 운동권의 전설적인 인물 ‘천영초’에 대한 평전이 아니라 영초언니를 바라 본 동생 서명숙의 자기 고백적 글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선의가 억울하고 안타까웠던 적이 있었다. 언니들은 진리편에 서는 일이 괴롭고 무서운데도 왜 외면하지 않았던 것일까. 불나방처럼 희생을 치룰 것을 알면서도 왜 뛰어드는 것일까. ‘영초언니’를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질문으로 가슴 아팠다. 그러나 또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인간의 역사란, 실상은 권력을 쥔 이들이 아닌 오히려 시대의 수많은 ‘영초언니’들로 인해 채워져 가는 것 아닐까. ‘잔혹한 격동의 시간 속에서도 뜨거운 우정과 사랑 그리고 작은 웃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경미 감독 추천사 중)이 아닐까.
문의 062-954-9420

이진숙<동네책방 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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