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 빗살무늬토기, 높이 36.9cm. 서울 암사동(기원전 4500년), 국립중앙박물관. <사진2> 빗살무늬토기, 높이 27.7cm, 함경북도 경성군 원수대 조개무지(기원전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 <사진3> 새김무늬그릇, 높이 14.1cm,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기원전 4000년 후반기), 북한 국보 제2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지 벌써 94년째 되어간다. 그 오랫동안 우리는 빗살무늬의 뜻을 풀지 못했다. 8000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하고 ‘생선뼈무늬’라 했다. 본보는 수 차례에 걸친 기획을 통해 세계 신석기 그릇 문화사 속에서 한반도 신석기 빗살무늬의 비밀을 풀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 빗살무늬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중국·일본·베트남 신석기인의 세계관에 한 발짝 다가가는 일이고, 그와 더불어 세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편집자 주>
--------------------------------------------------------------

 위 세 그릇의 공통점은?
 
 이 글을 쓰기 전 중3 딸에게 위 사진을 보여주고 물었다.
 “왼쪽 1번 그릇은 뭔지 알겠지?”
 “빗살무늬토기잖아요.”
 “그러면 오른쪽 2번, 3번 그릇은?”
 “이게 뭐지? 물그릇이나? 밥그릇이나?”
 셋 다 ‘빗살무늬토기’다.
 북한 사학계는 ‘토기’를 ‘질그릇’, ‘세모형 빗살무늬토기’를 ‘팽이형 질그릇’이라 한다. 그리고 ‘빗살무늬’라 하지 않고 ‘새김무늬’라 한다. 그러고 난 다음, 새김무늬 종류로 점선과 사선 띠무늬, 전나무잎무늬, 격자무늬, 타래무늬, 번개무늬, 점선물결무늬로 나눈다. 북한 사학계 또한 이러한 무늬가 ‘무엇’을 구상으로 하여 새겼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3>은 북한 국보 제2호 빗살무늬토기인데, 동그라미 부분을 보면 점을 찍다 말았다. 아니 ‘일부러’ 점을 찍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사진에서는 두 군데만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 네 군데 아니면 다섯 군데일 것이다. (이것은 신석기의 세계관(방위· 天門)과 관계가 깊다) 이 구멍은 ‘하늘 속’에 낸 ‘통로(天門)’인데, 북한 사학계에서는 이것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듯싶다. 만약 이 통로의 정체를 해석했다면 북한 사학계는 새김무늬토기(빗살무늬토기) 문양의 비밀을 진작 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위 세 그릇 사진을 가지고 우리나라 대학 사학과 강의실로 가서 학생들에게 물으면 어떤 답이 나올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미술사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교과서를 비롯하여 역사 관련 책에 ‘빗살무늬토기’ 사진을 실을 때 <사진1>만 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빗살무늬토기는 말 그대로 그릇에 ‘빗살’ 무늬가 있는 토기를 말한다. <사진1, 2>처럼 빗금을 짧게 새긴 것(동그라미 속)도, <사진3>처럼 점을 찍은 것도, 밑이 뾰족한 ‘세모형’ 토기도 모두 빗살무늬토기인 것이다.

<사진4>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빗살무늬는 점·선·원의 기하학적 추상무늬일까?
 
 한반도 신석기인이 빚어 쓴 그릇을 보통 ‘빗살무늬토기’라 한다. 그런데 그전 일본과 우리나라, 북한 사학자들은 즐목문토기, 즐문토기, 유문토기, 무늬토기, 기하문토기, 새김무늬토기라 했다. 물론 저마다 이 그릇 명칭을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리를 세웠고, 때로는 다른 명칭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하지만 정작 이 ‘빗살무늬’가 무엇을 새긴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점·선·원의 기하학적 추상무늬’라고만 할 뿐이었다. 사실 이 말은 모른다는 말을 좀 고상하게 돌려서 하는 말일 것이다. 더구나 빗살무늬의 비밀을 풀고 나면 이 무늬가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빗살’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빗의 가늘게 갈라진 낱낱의 살”, “내리 뻗치는 빗줄기”라 나와 있다. 이 두 뜻 가운데 우리 학계에서 쓰는 뜻은 첫 번째다. 필자는 두 번째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가깝다’고 하는 까닭은 우리 신석기 ‘빗살무늬’에는 빗줄기(雨)도 있지만 ‘물(水)’이나 ‘비구름(수분을 안고 있는 구름)’을 뜻하는 빗금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구름무늬’를 제안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논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빗살무늬’란 말을 쓴다.

<사진5> 도서자료 빗살무늬토기 편,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후지다 료사쿠와 한국의 빗살무늬토기 연구
 
 먼저 유리건판 <사진4, 5>를 보자. 이 건판은 일제강점기 어느 일본 학자가 찍어둔 것이다. 아마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 연구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후지다 료사쿠는 1930년 ‘청구학총’ 제2집에 ‘즐목문토기의 분포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빗살무늬가 저 멀리 북유럽 핀란드와 독일, 시베리아, 한반도, 알래스카와 북미주까지 걸쳐 있다 하면서 북방문화의 한 파문으로 보았다. ‘1930년’이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지 다섯 해째 되는 해다. <사진4> 속 그릇 조각 또한 암사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사학자답게 유럽의 질그릇 이론 책부터 들춰봤다. 놀랍게도 그 책에는 세모형 그릇도 있었고, 그 무늬 또한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이 무늬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어느 프랑스 학자가 이 그릇과 무늬를 두고 ‘기하학적 형상(figures geometriques)’(<사진5>)이라 했듯 그 또한 빗 모양 새기개로 문양을 긁어 구운 그릇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도, 그 뒤 우리도
 
 이 글 첫머리에 <사진4>를 먼저 내보이는 까닭이 있다. 후지다 료사쿠는 이 사진에 해답이 있는데도 끝내 그것을 보지 못했다. 우선 <사진4>에서 윗줄 가장 오른쪽 그릇 조각을 보면, 위쪽은 짧은 빗금을 그었고 아래쪽은 빗금을 양쪽으로 길게 새겼다. 아래 빗금은 ‘물고기 뼈(魚骨紋)’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다. 위 짧은 빗금 부분은 하늘인데,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파란 하늘’이 아니라 ‘하늘 속’을 뜻한다. 그 하늘 속에 짧은 빗금을 그어 물(水)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 ‘하늘 속’ 왼쪽을 보면 빗금을 긋지 않은 곳이 있다는 점이다. 긋지 않은 곳은 층층이 그 자리가 다른데, 이것은 신석기인들의 ‘하늘 속’ 세계관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사진4>에서만도 다섯 곳에서나 볼 수 있다.

<사진6-9> 서울 암사동. 국립중앙박물관.

 <사진6-9>는 그 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뒤 찍어놓은 유물 사진이다. 물론 우리 미술사학과 사학계에서도 이 ‘통로(天門)’를 보지 못했다. 만약 후지다 료사쿠가 이것을 보았다면, 그리고 마침내 빗살무늬를 해석했다면 우리 선사시대 역사는 지금과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의 신석기 빗살무늬도, 일본의 죠몽토기와 야요이토기도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도, 그 뒤 우리도 이것을 놓치고 말았다.
 
▲신석기인들은 왜 이런 무늬를 새겼을까?
 
 학자들은 ‘빗살무늬’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보아 왔다. 김원룡은 손톱무늬(爪紋 손톱조·무늬문)·생선뼈무늬, 유홍준은 기하학적 추상무늬·생선뼈무늬, 이건무·조현종은 기하학적 무늬·어골문(魚骨紋 고기어·뼈골·무늬문), 이이화는 어골문, 김양동은 빛살무늬, 북한 사학계는 새김무늬라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건무·조현종의 빗살무늬토기 설명글을 아래에 들어 본다.

<사진10> 스페인 발렌시아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아가리 쪽에 손잡이를 네 개 달았다. 몸통에 새긴 무늬는 우리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와 똑같다. 더구나 그 모양도 같다. 발렌시아 선사시대박물관.

 빗살무늬토기는 빗 모양의 무늬새기개를 이용하여 그릇의 겉면에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구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무늬 구성은 (……) 이른바 생선뼈무늬(魚骨文)을 비롯해서 다양하다. 이러한 기하학 무늬는 원래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바이칼·몽골까지 퍼졌던 고대 시베리아인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퍼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건무·조현종, ‘선사 유물과 유적’(솔, 2003), 27쪽
 
 학자들은 어떤 유물이나 무늬를 연구할 때 먼저 그 ‘기원’을 찾고 영향 관계부터 살핀다. 그런 다음 어디에서 가장 먼저 시작해 이것이 둘레 지역에 영향을 주고, 그러한 유물과 무늬가 이어졌다고 본다. 한때 우리는 위 인용글처럼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를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퍼진 것”으로 보아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빗살무늬와 한반도의 빗살무늬는 애당초 다르고, 발굴 조사 결과 시베리아보다 더 먼저 빗살무늬를 새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신석기 문화에서 빗살무늬를 살펴보면 이도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또 그 무늬가 ‘무엇을’ 새긴 것인지 알게 되면 빗살무늬를 보는 문제틀은 자연히 바뀔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들은 왜 이런 무늬를 수천 년 동안 새겼던 것일까.
김찬곤<광주대학교 초빙교수>
<사진11> 핀란드 빗살무늬토기(comb ceramic ware), 기원전 4000년 전. <사진12> 이란 바쿤 신석기 채색토기. <사진13> 영국 신석기 펜게이트 그릇(Fengate Ware), 버크셔, 높이 15cm. 대영박물관.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