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이육사의 치열했던 내적 갈등, 고뇌

▲ 연극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극단 푸른연극마을 제공>
 ‘연극 있다 잇다’ 프로젝트 마지막 작품을 보러 다시 ‘연바람 소극장’을 찾았다. 칼바람 부는 12월12일 수요일이었다.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고 불리는 12·12사태가 생각나는 날이었는데 나 말고는 딱히 39년 전의 그 날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마지막 공연 팀인 대구 극단 ‘한울림’이 선보인 작품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바로 한 명의 이름을 떠올릴 작품 제목이었다. 그렇다. ‘한울림’의 연극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는 시인 이육사에 관한 작품이었다.

 현존했던 시인의 생애를 바탕으로 극을 꾸미다보니 육사의 시가 많이 이용되었다. 육사의 시하면 보통 ‘광야’나 ‘청포도’를 생각할 것이다. 연극에서는 ‘광야’와 ‘청포도’ 말고도 ‘절정’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시가 배우의 입을 통해 낭송된다. 그리고 배우의 낭송에 맞춰 무대 뒤편에 있는 천 스크린에 시가 보여 진다.

주인공 육사는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한 명은 감옥에 있는 수인번호 264번 이육사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일제암흑기의 참담한 시기를 살아가는 이원록(이육사)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수인번호였던 264로 인해 원록이라는 이름을 육사로 바꾼다.)
 
▲ 총과 펜, ‘어떻게 싸울 것인가?’ 내적 갈등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에 관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극화에 어려움이 많다.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연극이라는 장르는 갈등이 중요한 요소인데 일제치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루다보면 일본제국주의 혹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갈등이 마치 지상명제인 것처럼 당연하게 나오기 때문에 때로는 클리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에도 그런 갈등이 나온다.

육사와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순사가 나온다. 그는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인데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하며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되고 싶어 안달난 인물이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는 이 당연한(?) 갈등 구조 외에 다른 갈등을 주제로 잡았다. 바로 육사 자신의 내적 갈등이다.

연극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극단 푸른연극마을 제공>

 육사는 마흔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17년 동안 17번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이 되기 1년 전인 1944년에 베이징에 있는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그러니 육사의 삶을 다룬 연극에서 수인 육사와 감옥 밖의 육사, 두 명의 자아를 보여준 것은 극단이나 대본을 쓴 작가의 고뇌의 산물로서 필연적인 귀결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육사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총을 들고 실질적인 투쟁을 벌이려는 생각(자아)과 문인으로서 글을 써서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갈등은 육사가 만주에서 광복군에 입대하여 총을 들고 훈련을 하다가 펜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위의 설득에 총 대신 펜을 택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내적 갈등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 많아 더 큰 무대 필요해보여
 
 연극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발음하기 힘든 일본어 ‘쥬고엔(15엔) 고짓센(50전)’을 시키고 당황해서 말하지 못하는 이들은 심지어 본토인들까지 죽였다. 어린 학생 하나가 발음을 잘못하여 대창에 찔려 죽을 때 육사는 머리를 감싸 안고 엉덩이를 관객석으로 향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숨는다.

그리고 노모와 아내와 어린 자식. 민족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일신의 영락을 버린 육사지만 가족의 안위는 역시 커다란 갈등 요소일 수밖에 없다.

 민족 해방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위해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고자 했고 그 결과 수없이 감옥을 드나들고, 은밀하게 의열단에서 활동했으며 저항시를 발표한 육사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는 그 무엇보다도 치열했다.

대구 극단 ‘한울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육사를 무대에 올렸다. 그래서 이 연극은 그저 과거의 한 시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인 지금에도 우리와 소통하는 바가 있다. 어떤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교감으로 인해 육사의 인간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보다가 마지막에 ‘광야’가 낭송될 때 관객들은 훌쩍인다. 그렇게 울면서 지금 이 시대에도 백마 탄 초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나만 했을까?

연극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극단 푸른연극마을 제공>

 ‘연바람’은 소극장이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는 소극장보다는 조금 더 넓은 무대가 필요한 공연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공간을 잘 활용해 공연을 올렸다. 육사를 맡은 두 명의 배우 또한 열연을 펼쳤다. 등장인물이 많고 그 등장인물을 소화하는 배우들이 겹치고 그래서 약간 어수선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고, 몇 장면에서 집중도가 떨어지고 스태프들의 실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1997년에 창단되어 지금까지 활발한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는 대구 극단 ‘한울림’의 정진을 바란다. 광주까지 와줘서 고맙고 다음에는 대구에 가서 직접 보겠다고 약속해본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