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의 여행’ 라스칼 글 루이 조스 그림 곽노경 옮김 (미래아이:2017)

▲ ‘오리건의 여행’ 책 표지.
 가을은 자기로의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계절인 듯 합니다. 아름답지만 서글프고 마지막인 것 같지만 다음을 준비하며 거둬들일 것이 많아서 일까요.

 “듀크,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

 살다보면 지금의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듯하여 마음을 서성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희망이나 계획도 없이 지금의 자리에 붙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럴 때 자신의 돌아갈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차라리 행운인지도 모릅니다.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에 등장하는 곰 오리건이 광대 듀크에게, 어느 날 밤 서커스단 우리에 다시 갇히며 건넨 말처럼 말입니다.

 누가 압니까? 혹시 나도 그곳에서 백설공주를 만나게 될지….
 무거운 짐과 주머니를 축 늘어지게 하는 열쇠 꾸러미는 두고 갔습니다.

 듀크는 오리건의 부탁을 빌미삼아 길을 나섭니다. 그러고는 입 밖에 내뱉지 못했던, ‘백설공주’를 만나고 싶은 희망도 슬그머니 끼워 넣어 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은 녹록치 않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두고 있던 돈을 전부 끌어 모았지만 곧 바닥이 나고 말지요. 미국 동부 피츠버그에서 출발해 서부 오리건까지의 횡단여행은 키 작은 광대 듀크와 평생 우리속에 갇혀 살았던 곰 오리건에게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왜 아직 빨강코에 분칠을 하고 있소? 이젠 서커스 무대에 서지도 않는데.”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흑인으로 사는 건 쉬운 일 같소?”
 우리는 한 식구였어요….

 얻어 탄 차에서 운전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은 알게 됩니다.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은 서로의 꿈과 자리를 찾아가는 일에 담담하지만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걸요. 그렇게 떠돌이 장사꾼, 여배우가 될 거라는 슈퍼마켓 종업원, 이 빠진 깃털 장식을 한 인디언 추장의 차를 얻어 타면서 이 둘은 길을 이어갑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나는 반 고흐의 그림 같은 들판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지요.

 우박이 내리면 맞으며 걷고 옥수수 밭에서는 잔치를 벌이고 별빛 아래에서 꿈을 꾸며, 오리건과 함께 길을 가는 동안 온 세상이 둘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진정한 자유와 풍성한 순간을 만끽하면서요. 그리고 마침내 광활한 오리건의 숲….

 오리건에 온 오리건! 나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침이 하얗게 밝아 오면, 나는 떠날 겁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잃어버린 꿈과 자유를 향한 두 친구의 기나긴 여정이 이제 끝이 나나 봅니다. 그리고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가득, 빨간코 장식을 드디어 떼어낸 듀크가 숲 사이로 난 길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입니다. 난쟁이 어릿광대 딱지를 떼어내고 자기만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 모습이 혼자이지만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지도 작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리.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만이 솟아오르네.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아르튀르 랭보 (1870년 3월)
 
 그림책의 서두에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 ‘감각’이, 안내문처럼 혹은 길을 나서라는 주문처럼 적혀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사랑만을 따라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생각지 않으면서 의무가 아닌 자유로 나서라고요.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떠날 순 없겠지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사랑을 간직하고 살 순 있지 않을까요. 이런 눈물나게 아름다운 가을에는 말입니다.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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