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 속에는 끌 수 없는 불꽃이 있다

▲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어제는 별이 졌다네.
나의 가슴이 무너졌네.
별은 그저 별일뿐이야
모두들 내게 말하지만

오늘도 별이 진다네.
아름다운 나의 별 하나
별이 지면 하늘도 슬퍼
이렇게 비만 내리는 거야.

나의 가슴 속에 젖어오는
그대 그리움만이
이 밤도 저 비 되어 나를 또 울리고
아름다웠던 우리 옛 일을 생각해 보면
나의 애타는 사랑 돌아올 것 같은데.

나의 꿈은 사라져가고
슬픔만이 깊어 가는데
나의 별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짙어 가는데.
- 여행스케치 ‘별이 지다’

▲눈에는 별을 가슴에는 태양을

눈에는 별을, 가슴에는 태양을 품었던 사내.
“나는 그림에 삶을 걸었건만 이성은 반쯤 허물어졌다. 이제는 발걸음마저 휘청거린다.”고 썼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27살에 그림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화가였으나, 37살 생을 마치기까지 10여 년 동안 800점의 그림과 1100점의 습작품을 남긴 왕성한 창작욕의 소유자.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 가슴속에는 끌 수 없는 불꽃이 있다. 이 불꽃이 어디로 나를 끌고 가는지 알지 못해도 더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할 불꽃이라는 느낌이 든다.”

파리에서, 오베르에서, 빛이 허공을 가득 채운 남프랑스의 시골마을 아를에서, 장소는 저마다 달랐으나 그의 생활은 단순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는 그렸다.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네가 보내준 돈을 받았을 때는 어떤 음식도 소화시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증명되며 그림으로 자기를 말한다. 한 점 회화에는 화가가 익힌 기법과 고래(古來)의 기법을 넘어 새로이 발견한 그만의 표현법, 대상을 향한 의도와 무의식적 감성이 한데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가의 창조성이라고 부르며, 그래서 고전이 된 문학과 마찬가지로 고전이 된 그림에도 그토록 할 말이 많은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말했다.

“새로운 것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에 응답하면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동시에 확립된 것은 새로운 것에 답하며 자신을 재형성해야 한다. 전통이 더 이상 논쟁되거나 변경되지 않을 때 그 전통은 아무 쓸모도 없어진다. 그저 보존되어 있기만 한 문화는 결코 문화가 아니다. 어떤 문화적 대상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그 힘을 유지할 수 없다.”

고전주의의 쇠락과 인상주의의 대두 사이에서, 고흐의 그림은 누구의 것도 아닌 고흐 자신의 것이었다.

그를 후기 인상주의자라 칭하기엔 애매한 무엇, 순간순간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포착하려한 인상주의에도 갇히지 않는, 인상주의를 넘어서는 무엇이 고흐의 그림에는 있다.

그 독특함을 ‘실천의 밀도가 매우 높은 자의 정신성’이라고 표현한다면 무리일까. 따지고 보면 고흐의 삶 전체가 그러했다.

네덜란드의 가난한 시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의 첫 번째 꿈은 아버지와 같은 성직자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신을 사랑하고, 신을 섬기는 방법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판단한 젊은 고흐의 영적 순례는 후에 이어진 예술적 순례만큼이나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큼 격정적이며 열광적이었다.

임시 전도사의 자격으로 도착한 탄광촌 보리나주에서, 스무 살 고흐는 자신의 침대를 광부에게 내어주고 짚더미 위에서 잤다. 변변치 않은 월급을 몽땅 줘버리고 빈털터리로 지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돋보이기 위한 선행을 경계하라’는 뜻도 있으나 관계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장은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의 이웃을 경계하라.’는 니체의 역설적 문장과도 통한다. 이웃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며 나를 돕는, 근거리에 위치한 존재다.

곤란한 처지에 놓일 때 진자리 마른자리 가림 없이 나를 위해 솔선수범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부탁을 간단히 들어주는 존재는 나의 독립을, 나의 성장을, 스스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갖게 될 자부심을 저해한다. 내 삶의 주인 됨, 전사적 기질을 꺾는다.

마찬가지로 주고받음이 대등하지 않고 한편으로 기운 일방적 베풂은 받는 대상이 은연중 베푼 대상을 미워하게 만드는데, 그의 행(行)이 나의 나약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를 니체는 ‘주인을 미워하는 노예’라고도 표현했다. 6개월 만에 고흐는 광부 마을에서 기이한 인물로 외면받기 시작했고 전도사 협회는 그를 파면했다.

협회의 관료주의와 가난하고 말쑥한 양복을 빼입은 존경할만한 전도사를 기다리던 투박한 마을의 성정은 그의 이상주의적인 기질과 심취하는 면면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일상적이었던 것일까. 고흐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림은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전도사 협회가 고흐를 파면한데 깊이 감사하는 사람이 나뿐 만은 아니리라. 우리가 아는 고흐가 그 후 탄생하기 때문이다.

노란 해바라기와 휘몰아치는 별의 화가, 다수는 고흐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러나 고흐가 사랑한 최초의 대상, 가장 자주 화폭에 옮긴 대상은 사람 그 중에서도 농부였다. 흐릿한 호롱을 밝힌 투박한 나무식탁에 앉아 농부 가족이 한 소쿠리의 찐 감자를 저녁의 끼니로 나눈다.

감자를 쥔 손은 비에 젖은 마른 가을나무 등걸처럼 짙고 불퉁하다. 크고 퀭한 눈이 담긴 아낙의 낯빛도 굵은 감자알처럼 흙빛이다. 생명을 기르고 거둔 자가 다시 생명을 먹는다.

그렇게 생은 생으로 연결되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릴 당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18시간을 그렸다고 고흐는 적고 있으나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이는 적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그림을 소장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운 전원과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풍경 혹은 극적 감동을 주는 회화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

가령 ‘메데이아’와 ‘사르나팔의 죽음’ 등 들라크루아 회화의 주제는 어둡고 비극적임에도, 화려한 색채와 인물의 역동성이 비극을 압도하며 그림에 일종의 신화적 색채를 부여한다. 그래서 나와는 무관한 예술 작품으로 즐기고 감상할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러나 고흐의 그림은 아프다. ‘꽃 핀 아몬드 나무’의 투명함은 ‘까마귀 나는 밀밭’의 스산함만큼이나 사실적이다. 무딘 관성의 껍질을 벗은 눈만이 포착 가능한 생의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꽃 핀 아몬드 나무’는 생 레미 병원에 입원해 있던 고흐가 조카의 탄생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그린 그림이다. 봄에 잎을 툭툭 터트리는 아몬드 나무의 꽃말은 희망과 기대 그리고 진실한 사랑, 조카가 보고픈 삼촌의 사랑은 봄의 아몬드처럼 다시 한 번 생에 희망을 품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밀려드는, 이 아이가 마땅히 취해야할 몫을 자신이 빼앗고 있다는 미안함과 부채감. 시장의 논리에 타협할 수 없는 예술가로서의 자존과, 가족이 생긴 동생에게 생활비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능이 고흐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질병이 고흐를 좀먹기 전부터 심리적 부담과 과도한 집중은 고흐의 건강을 헤집고 있었다. 조카 빈센트가 태어나고 6개월 후 고흐는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봄은 온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사실, 그림을 그린 지 10년이 지난 시점부터 고흐의 이름은 서서히 세간에 알려지고 있었다. 전시회 출품을 의뢰하는 화랑이 생겨났고 이름이 신문에 언급되기도 하였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세잔이 가진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하기도 했던 테오는 형이라서가 아닌, 고흐의 그림이 갖는 선구적 위치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해본다. 만약 빈센트가 아를로 이사해 예술가들의 공동체인 코뮌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고갱을 만나지 않았다면, 급속도로 무너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10년을 더 살았더라면 우린 그의 그림의 지평이 어디까지 넓어지는지 목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위대한 대가들이 그러하듯 창조의 주기를 살아낸 후 찾아온 원숙의 시기에 결국 고흐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된 세간이 그의 일생에 걸친 치열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육성으로 듣지 않았을까.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진실에 대하여. 비극은 아를의 노란 집에서 시작되었다.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다

1888년, 파리에서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로의 이동을 고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밝은 색채의 고장으로 간다.”고 적고 있다. 아를에서 고흐는 화가들이 모여 살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 판 돈을 함께 나누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었다.

신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던, 노랑이 사랑의 색이라서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이 수줍고 과묵한 청년화가의 순박한 바람은 그러나, 아를에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의 노란 집에 도착한 고갱은 둘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은 폭발하는 화산이고, 다른 한 사람은 펄펄 끓는 화산이다. 우리 둘 사이엔 일종의 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

고갱과 고흐는 여러모로 대립되는 인물이다. 고갱은 자신이 본 것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방식을 즐겼다.

반면에 고흐에게는 대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고흐가 고갱과의 관계를 절대적인 우정 관계로 파악했다면, 고갱에게 고흐는 필요에 의해 맺은 공동체 혹은 교환 관계였다.

바라보는 관점이 물과 기름처럼 달랐던 고갱이 붓 쥔 고흐를 흐리멍덩한 눈매를 한 취객처럼 그렸을 때, 고흐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밤 고갱을 공격하는 대신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자르고 졸도했다. 화가 공동체는 6주 만에 끝이 났다.

생각한다. 고흐가 꿈꿨던 공동체, 아낌없이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가 인간 공동체에 과연 가능할까?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공동체는 사랑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랑’이 일방적 참음과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경우란 얼마나 잦은가. 사랑을 베푼 이가 ‘감사’를 기대할 때 사랑이 평화 아닌 억압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서에서 한발 물러서 각자가 수행해야할 역할에 자신을 맞추는 공적 태도가 필요하다. 연대는 정서적 차원이 아닌 이성적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공동체는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다 서열화 되거나 어디로 가는지 모를 무질서와 광란에 휩싸이기 쉽다.

전자는 흉폭하고 후자는 난삽하다. 고흐가 꿈꾼 ‘화가들의 연대’에는 이상과 사랑은 있었으나 방향이 결여되어 있었다. 어쩌면 고흐는 지나치게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맺는 관계는 종종 맹목적이고 극단적이다. 고흐가 사랑한 여인들이 고흐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 아니었을까.

인간관계에서 중용의 덕성은 무척 중요하지만 ‘안녕함’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가지 못하는 ‘절제의 평범성’이 중용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관성을 깨는 변화와 속력! 고흐는 화가로 산 10년 동안 창조적 열정, 지속하는 에너지로 예술에 ‘끓는점’을 만들었다.

가보지 않은 길과 시도해보지 않은 방향, 그것을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삶은 삶 자체가 예술이기도 한데 고흐의 삶이 그러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태워 도달할 수 있는 깊이와 높이를 빈센트, 당신은 보여주었다.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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