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 당신과 내 삶에 대한 이야기’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 당신과 내 삶에 대한 이야기’ 이혜숙 지음 (글항아리)
아, 이런. 그저 지나간 감성으로 품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애정인 줄 알았다. 인생 후반을 지내면서 그간의 삶을 정리하는 글 모음인가 했었다. 제목을 듣고 보는 순간, 그 분에게는 죽을 것 같은 맘을 부여잡고 버티다 나온 생명 같은 글임을 알 수 있었다. 한장 한장 넘기며 읽는 글은 짧은 단상정도의 분량이었고 주변에서 만난 흔히 봄직한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가벼이 흩어지는 이야깃거리가 아닌 것은 작가의 글맛 때문이고 그들에 대해 담고 있는 애정 어린 마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 언급된 책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글이 있는가 하면, 읽다보면 글을 쓰고 싶어지는 글이 있다. 이혜숙 작가의 이번 책은 읽을수록,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맘이 들게 한다.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이토록 맛깔스럽게 써 내려가다니.
그러다가 버럭 했다. “동네사람 다 잘 살아야. 너나 잘 살어라이. 들가.” - 252쪽 ‘너나 잘 살어라이’
세라피나가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가져온 것은 모시적삼 하나였다. - 66쪽 ‘세라피나의 모시적삼’
시래깃국 하나도 삼삼하면서 부드럽고, 굳혀둘 곡식과 속히 덜어낼 것들을 알아 창고에 나방 한 마리 날게 하지 않으며, 수많은 봉제사를 위한 누룩이며 엿기름, 마른 나물을 준비하고 그 것들을 연필로 기록하는 법 없이도 자연스레 머리에서 술술 풀어내던 무덤덤한 얼굴의 엄마. 면박과 퉁생이로 대하던 할머니와 아버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엄마의 존재가 일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 81쪽 ‘엄마의 가출은 장독대까지’
긴 인생 우여곡절을 닥치는 대로 살지언정 꾹꾹 눌러 담아 다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는 요란하진 않지만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어릴 적 동네길 어디 무슨 큰 나무의 그늘로 어둑한 그 언저리에 사는 방촌댁의 이야기가 그렇고 차별받는 며느리면서도 자기 것 챙길 줄 모르는 세라피나 이야기며 증조할머니부터 어머니에 이르는 삼대고부의 이야기 등 마치 대하소설의 일부를 읽는 듯 흥미진진하면서도 찡하다. 그저 이야깃거리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뿍 담겨서고 작가의 인생이 녹아 있어서리라.
“그런디 그 말이 뭐시여. 아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할머니는 긴 상념에 잠겼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모르는 소리.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다, 암!”
조선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인생의 부침을 너무 많이 본 할머니는 굽이굽이 인생을 길다고 보았다. 왜 두 분은 안계시나. 생일날 내가 받은 봉투 나눠드릴텐데. - 125쪽 ‘내 생일’
광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음식점을 운영한 지 꽤 되었는데, ‘사장님’이기보다는 문학 동아리 선배언니 같다. ‘그냥 내 글 모아 책 하나 내는 것으로 묵혔던 마음 털어버리려고’ 한다며 지나가듯 한 그 말은 못들을 것으로 해야겠다. 왠지 오랫동안 ‘작가’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제 작가로 나선 그에게 나는 벌써 다음 책을 주문하고 있다. ‘토지’에 버금가는 다채로운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소설 한 편, 기다릴께요!!!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문의 062-954-9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