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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가게]꽃속에 파묻혀 살아온 38년   [2005.01.21]

지금 중년의 나이에 걸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집은 전혀 낯선 곳이 아니다. 특히 꽃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으레 “어! 그 집이 아직도 있어?”라고 반문하기 마련이다. 꽃집 문을 열 무렵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막내아들이 지금 삼십대 중반을 넘어섰으니 그 집이 지나온 세월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역사로만 따진다면 현재 광주 바닥에서 꽃집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 중에는 따라올 자가 없는 집, 대인동에서 38년의 시간을 견뎌낸 `푸른화원’이다. 가게...
[오래된가게]진열된 단추만 1만 가지   [2005.01.14]

양복이나 양장점에서 맞춘 옷을 입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가게다. 알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광주 어딘가에 붙어 있는 양장점에서 옷을 맞췄다면 십중팔구는 그 집에서 팔려나간 단추를 사용했을 것이다. 기성복이 아직 등장하기 전인 지난 79년 문을 열어 25년의 시간을 짱짱하게 버티고 있는 `로얄단추’. 가게 안이 온통 단추로만 채워져 있다. 어른 새끼손톱보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는 주먹에 가까운 것까지 그 종류만도 1만 가지, 단추 박물관이 따로...
[오래된가게]“백 열 살 묵은 미싱도 있제”   [2005.01.07]

양복점과 양장점, 미싱사…. 70년대 광주 시내 상권을 주름잡던 업종이다. 현재까지도 양복점과 양장점에는 번화의 흔적이 다소 남아 있다. 그러나 `미싱(재봉틀)’은 취급하는 가게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한때 수입산 미싱 한 대 값이 논 서너 마지기를 웃돌고, 그것이 결혼 필수품이었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학동에서 34년의 시간을 견뎌온 한일미싱. 채 세 평을 넘기지 못하는 가게에 많은 재봉틀들이 진열돼 있다. 새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모두...
[오래된가게]아이들 키높이 의자 그대로   [2004.12.24]

그 집에는 아직 옛날식 이발 의자가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벽 한 귀퉁이에는 아이들 키높이를 맞추는 나무 합판 의자도 세워져 있다. 이발을 끝내고 머리를 감는 세면대의 양은 세숫대야도 옛날 그대로다. 붉은 벽돌에 `쓰레트’ 건물 자체에서 이미 오래된 시간의 향기가 느껴지지만 청송이발관이 견뎌온 세월은 상상의 폭을 훨씬 뛰어넘는다. 50대 후반의 아저씨가 머리를 자르며 “여가 나 중핵교 댕길 때부텀 맨나 머리 짜르던 곳인디 아직도 있당께”라는 말을 뱉...
[오래된가게]“옛날에는 전부 사들고 가지, 배달이 없어”   [2004.12.17]

가게가 문을 연 지 20년이 지났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간판만은 질긴 시간을 그대로 간직했다. 가게 앞과 옆면으로 네댓 개의 간판이 걸렸는데 글자가 다르다. 어떤 것은 처음 그대로인 반면 어떤 것은 아크릴판이 세월에 떨어져나가 자음과 모음이 제각각이다. 계림동 `계림종합싱크’의 역사는 주인장의 맏이와 함께 한다.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갓난아기였던 맏이가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
[오래된가게]“요즘은 PC방이 기원이여”   [2004.12.10]

바둑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마땅한 놀이문화가 없어 바둑에 취미를 붙이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리 바둑을 좋아해도 맞둘 사람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 그 고민을 풀어주는 곳이 기원이다. 80년대까지 바둑인구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광주 시내 곳곳에 기원들이 차려졌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간판을 바꿔 달았거나 개점휴업 상태에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만 기원을 찾지 않더라도 언제나 바둑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
[오래된가게]“스무 곳 있었는디 나 혼자 남었네”   [2004.12.03]

고가의 예술 작품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 경제가 부동산 경기로 흥청이고, 대규모 개발로 곳곳에서 졸부들이 탄생하던 70∼80년대 이야기다. 글씨나 그림 등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덩달아 표구점들이 무더기로 생겨났고 모두 호황을 누렸다. `월남표구’는 80년대 초반 농장다리 부근에서 문을 열어 지금껏 22년의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다. 현재는 농장다리에 표구점들이 몰려 있었다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80년대 초반만 해도 20곳 ...
[오래된가게]“개업선물은 거울이 젤로 인기였제”   [2004.11.10]

오래된 이발소에는 반드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푸쉬킨의 시가 허름한 벽면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이나 호랑이, 가화만사성이란 글자, 태극기 등이 담긴 액자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선물이나 장식용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가면서 웬만한 유리 가게들은 모두 그런 류의 액자를 판매했다. 그러나 현재는 몇몇 시골집을 제외하면 그런 액자가 걸려 있는 풍경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인동에서 30년의 시간을 견뎌온...
[오래된가게]“쌀 다섯가마 가래떡 뽑아도 부족했제”   [2004.11.03]

마땅히 입을 달랠 먹을거리가 없었던 시절 떡은 가장 친숙하면서도 귀한 음식이었다. 잔치나 제사, 이사에는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먹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넘쳐나면서 떡의 위상도 하락했고 자연스럽게 떡방앗간들의 명성도 떨어졌다. 쉴틈없이 돌아가던 떡가루 기계들은 멈춰 섰고, 광주의 웬만한 동네에 몇 곳씩 자리 잡고 있던 떡방앗간의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다. 학동 `풍년떡방앗간’은 같은 자리에서 20년 넘게 떡을 만들고, 참...
[오래된가게]“수입품 들어옴서 계속 내리막이제”   [2004.10.27]

한때 목공예품들이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 경제가 부동산 경기로 흥청이면서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던 80년대다. 이전에는 개념조차 없던 인테리어가 사업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목공예품들의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치부되던 목공예품들이 일반에 조심스럽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목공예 책상이나 바둑판, 장식품들이 인테리어 용도로 거실 중앙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석동의 민예공방은 1980년에 ...
[오래된가게]“한 달에 사십 절 맞추던 시절도 있었지”   [2004.10.20]

한때 웬만한 거리마다 양복점 간판 하나씩은 걸려있던 시절이 있었다. 단지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양복 만드는 기술 하나면 평생 밥벌이가 `따논 당상’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당시에는 기성 양복을 파는 곳이 전무했고, 세상의 모든 양복들은 양복집 점원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성복이 시장을 평정하면서 맞춤양복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서동 서광라사는 30년의 시간을 양복점으로 짱짱하게 버텨왔다. 가게의 역사는 30년이지만 주인 김남길(50)씨가 양복...
[오래된가게]“평생 헌 문짝으로 묵고 살았지”-현대문집   [2004.10.13]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나라 경제가 어려웠던 70, 80년대만 해도 헌책방처럼 헌 문짝을 취급하는 업소가 많았다. 새것에 비해 가격이 `반의 반값’밖에 되지 않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헌 문짝 가게들도 물건 수급이 원활했다. 당시에는 집을 고치는 경우가 허다해 거저 문짝을 구해와 약간의 수리를 거쳐 물건을 되팔았다. 그러나 현재는 헌 문짝을 취급하는 집 자체가 거의 전무할 뿐더러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동명동에서 30년...
[오래된가게]“인자 함석은 종점이여”   [2004.10.06]

함석이 우리나라의 주택양식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일제시대다. 아직까지도 함석을 다루는 연장이나 작업 용어는 모두 일본어이며 기술을 전수한 것도 일본인이었다. 함석이 일반의 주택에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으로 새마을운동 직후였다. 온 나라가 집을 뜯어고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대적인 집 고치기가 행해졌던 70년대 초가지붕이 대부분 함석으로 바뀌었다. 함석집들이 최고의 호황기를 걸었던 것도 그 시절이다. 광주에만 150여 곳에 달하는 ...
[오래된가게]“하루 열 벌 팔던 시절도 있었제”   [2004.09.22]

재래시장들이 한창 잘 나가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서방시장에는 20여 곳 가까운 한복집이 몰려 있었다. 충장로 상권과 함께 광주의 한복시장을 석권했고, 한창 결혼 시즌인 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재래시장이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매출은 끝없는 하향곡선을 그렸다. 현재 서방시장은 거의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나마 한복집들은 예전의 명성에 힘입어 선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한복집도 7곳으로 서방시장에서 단일 업종으로는 ...
[오래된가게]“요새 누가 쌀가게서 쌀 팔아 묵가니”   [2004.09.15]

도시 골목골목마다 최소한 하나씩 쌀상회가 자리잡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쌀이 귀했던 시절 쌀가게에는 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쌀보다 보리가 더 잘 팔리던 때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시절이 그리 멀지 않다. 커다란 함석 광주리에 쌀이며 보리, 조, 수수, 동부, 결명자 등 땅에서 나는 모든 곡식은 모두 담겨져 있는 북구 풍향동 만춘쌀상회는 그 시절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30여 년 전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노점으로 쌀을 팔다가 현재의 가게로...
[오래된가게]30년 단골의 힘-금남로 5가 익수당 한약방   [2004.09.08]

70년대 현재의 대성약국 자리에 중앙여객이 있을 때만 해도 금남로5가는 외지 손님들로 북적였다. 인근 대인동에 구터미널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광천동 터미널시대가 열리면서 금남로5가는 금융가가 위치한 1·2가와 달리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금남로 5가에서 30여 년의 시간을 견딘 익수당 한약방은 버스터미널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그 인근에는 40개가 넘는 한약방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많은 한약방이 경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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