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번 버스 타고 대촌동 가기

▲ 얼쑤 문화체험터 옆 양과마을. 어스름한 저녁, 이발소 불빛이 두드러진다.
이 때쯤일 것이다. 황금빛 보리라는 말을 꺼낼 때가... 문득 노을에 물든 보리가 살랑거리는 물결이 떠오른다. 그렇게 14번 버스를 탔다. 나주평야와 이어지는 대촌동. 행정관할상 광주광역`시’ 남구에 속하지만 인성고를 지나 차창밖으로 보이는 논밭은 `시’와 `군’의 경계선처럼 보인다. 오후의 햇살에 반사된 비닐하우스들이 은빛 갑옷을 입은 군대마냥 대열을 이룬다.
`잘 살아보세’ 새마을 깃발 여전
도시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 대촌동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봉해져 있었던 곳. 1914년 유등곡면과 칠석면, 대지면, 계촌면을 통합해 그 중 대지면과 계촌면을 따 지은 `대촌’은 구소리·대지리·석정리·승촌리·신장리·압촌리·양과리·양촌리·원산리·월성리·이장리·지석리·칠석리·화장리 등 15개 리를 관할했다.
지난 95년 남구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대촌동이 되었다. 이렇듯 행정 편의에 따라 일방적으로 구획된 대촌이었기에 지금 주민들은 `주민의견 무시한 광주시 그린벨트 해제 전면 재조정하라’며 플래카드로 반발을 드러내고 있다.
70년대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새마을 깃발은 지금도 대촌천 앞에서 펄럭인다. `잘 사는’ 게 `개발’을 의미했던 70년대. 30년이 지난 지금도 `도로공사’는 여전하다. 물류 유통 시간을 조금 더 단축시켜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풍암유통단지와 포충사간 도로를 뚫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한편에선 수익을 높이기 위해 도로를 만들고, 한편에선 수익이 없다는 이유로 `버스’를 줄인다. 도로는 늘어나지만 정작 대촌 주민들을 위한 길은 아니다. 2차선의 좁은 도로로 속력을 내는 차들 옆을 눈치껏 피하며 걷는 아스팔트에 인도는 아예 고려되지 않았다. 버스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큰 짐을 지고 가는 어르신의 표정엔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일상이었던 것.
보리 베느라 손주 돌볼 새 없고
보리는 한풀 꺾인 모양새다. 황금빛 물결을 기대했다 눈앞에 펼쳐진 `시든’ 광경에 이내 실망감이 들다 순간 멈칫해진다. 물정 모르는 도시민의 이기심이었나. 보리 나락을 베느라 손주녀석도 돌볼 새 없이 밭일을 하는 어르신이 보인다. 일상에서 비껴간 `客’이 돼버린 채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2년전 사물놀이패 `얼쑤’의 문화체험장이 된 대촌동초등학교에는 지금 드라마 촬영세트장이 세워지고 있다. 남구청에서 촬영을 유치한 KBS 미니시리즈 〈구미호외전〉의 촬영세트장을 짓느라 여기저기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도자기 제작, 들꽃 체험, 풍물놀이 등 체험교실의 학습장으로 꾸려진 얼쑤 `문화체험터’가 또다른 변화를 보태고 있다.
각시탈과 하회탈이 그려진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삭막하게 방치된 시골정류장에 벽화를 그리는 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임 `좋은세상만들기’가 만든 작품. 내려가다보니 이번엔 장승 그림이 버스정류장을 채우고 있다. 한참을 내려간 발걸음에 포충사가 닿는다.
의병 이끈 고경명 선생 기리는 포충사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 유팽로·안영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왜란이 종결된 1601년 호남지방 유생들이 제봉산 자락에 사당을 세운 것을 2년 뒤 박지효와 그 후손들이 임금에게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라는 이름과 액자를 받았다. 대원군이 서원을 정비할 때에도 전남에서는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폐쇄되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
포충사 앞을 나서자 돌로 쌓아놓은 포충교가 코스모스길로 꾸며진 산책길로 이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코스모스길을 걷다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기다린다. 4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이 놈의 버스 탈라믄 시간을 잘 맞췄어야 하는디. 하남떡하고 이런 저런 얘기하다본께 버스를 놓쳐버렸네잉” 하는 할머니의 푸념이 들린다. 그런 중에도 할머니는 남의 사정까지 걱정한다. “아가씨는 몇 번 탄가? 그래도 벌써 이리 어두웠졌는디 어찌까.” 모르는 사람한테도 그런 말을 건네는 인정이 있는 시골 버스정류장이다. 정현주 기자 ibox@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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