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번 타고 야촌마을로

▲ 플라스틱 의자가 아니라 손때 묻은 나무의자가 정겹다.(대촌동사무소 정류장)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白紙)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한다. 그럼―나는 최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이 좋다.〉(이상의 《권태》중에서)
소설 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109번을 탔다. 그것이 좋을 듯 했다. 사실 좋고 나쁨을 댈 수 없다.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길을 나서는 게 언제나 목적을 갖출 순 없다.
종점에서 버스 기사들은 한 숨 돌리고
종점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익숙치 않다. 종점은 버스를 위한 대기소다. 대열을 갖춘 버스를 보다 머뭇거려진다. 변변찮은 의자도 갖추지 않은 종점에서 버스 기사들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한 숨 돌리거나 담배로 시간을 태운다.
“새벽 3시30분쯤에 나와서 공장(회사)으로 들렀다가 5시 안까지 자기 출발소로 가제. 자투리 시간에 잡담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허허) 어제 유승민이 금메달 딴 거 봤는가?” `첫번째 손님’이라 자연스레 두런두런 말을 나누게 된다. 푸르디 푸른 지산유원지를 그렇게 빠져 나온다. 삼진아파트를 지나 푸른맨션을 넘어간다. 정류장에 사람이 없다. `첫번째 손님이자 혼자뿐인 손님’을 태우고 버스는 차근차근 정류장을 지나간다. 주택가를 벗어나 도심 속으로 들어갈수록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고층건물에서 형광등 빛이 새 나온다. 밤이고 낮이고 형광등은 켜져 있다. 백화점 쇼핑백을 든 몇몇이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광주일고를 지나 양동시장에 들어선다. 버스 정류장에 따라 사람들의 입성도 조금씩 달라진다. 보따리짐을 머리에 이고 한 손에 봉다리를 든 이들이 버스에 올라탄다. “아구메” 얕으막한 버스 계단에 발을 디디면서도 짧은 한숨이 나온다. 빈 자리에 짐을 던져두고 승차권을 내는 이의 손이 거칠다. 양동시장에 이르자 빈 자리는 다 채워진다. 대성로터리를 넘어가 대광여고, 동성고에서 사람들이 내리자 109번 버스는 마치 마을버스같다. “오랫만이요” “어디 간가?” 몇 정거장 지나서 탔건만 다들 눈인사를 주고 받는다.
마을버스처럼 정겨움 오가는 버스 안
버스가 포충사 가는 길로 우회전을 하는 순간 광주를 벗어난 것 같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적힌 해태상도 없지만 경계선을 넘어선 듯 낯설다.
광주`시’에 도심의 이미지만을 구겨넣었기 때문일까. 초록이 드문 도회를 벗어나 좁은 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푸른 논을 바라본다. 두달 전 공사중이던 `드라마·영화센터’는 이미 완공된 상태. 벼가 쑥쑥 자라고 있다. 버스는 유유히 포충사를 지나 대촌을 지나간다. 주위를 둘러봐도 푸른 논길과 비닐하우스 뿐. 눈을 어지럽히는 전광판도, 고층건물도 없다. 논길을 내달리다 잠시 멈춘 대촌동사무소 정류장에서 잠시 `도회지’를 만난다. 일상의 테두리에 갇혀 도시를 재단하게 된 걸까. 은연중에 도시와 비(非)도시로 나누고 있다. 정류장에 서너곳 표기된 버스가 문촌을 지나자 109번만 적혀있다.
버스가 들어서자 길이 버거워 보인다. `문촌―도호―신야촌―신광―구야촌’ 구간은 109번 전용구간이다. 신광 정류장을 지나치려 할 때 버스를 급하게 치는 소리가 난다.
바깥 사람보다 안에 탄 손님들이 더 다급하게 외친다. “기사 양반! 차 좀 세워주쇼. 한눈 팔았나 보네” 소리도 나오고 누구는 창문을 열며 “언능 와 언능” 손짓하느라 바쁘다. 하루종일 버스 한 대만 다니기 때문에 놓치게 되면 서너시간은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차문에 올라서는 이의 표정이 금메달을 받은 선수같다. 신광을 경계로 야촌마을은 구야촌과 신야촌으로 나눠진다. 구야촌은 광주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 송정읍내에서 잘사는 동네였지만 지금은 예전같지 않다.
마을 북쪽 들 가운데 있는 `쉬양치(송아지) 방죽’은 잉어나 붕어 등 물고기가 많이 살아 낚시꾼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신야촌은 80여년 전 여흥 민씨 일가가 보성에서 옮겨와 터를 잡은 뒤로 사람들이 점차 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신야촌 마을 남서쪽 들판은 `해오라기들’이라고 부른다. 해오라기가 많이 찾아오기 때문. 지금은 시설원예를 하면서 가계 수익을 내고 있다.
신야촌을 빠져나와 장암마을에 들어서자 정류장에도 버스 대수들이 늘어난다. 극락강 천변을 지나치면서 다시 북적대는 `도심’으로 버스는 들어선다. 한적함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건만 북적대는 공간에 다시 돌아와 `익숙함’을 느끼며 마음을 놓는 이 역설.
정현주 기자 ibox@gjdream.com
버스노선: 지산유원지 입구―삼진아파트―푸른맨션―조대여고 ―과학관 ―조대입구 ― 동구청 ―전남여고―대인파출소―동부소방서―롯데백화젬광주일고―아세아극장―양동시장―동신대한방병원―월산초교―무진중―대성로타리―까치고개―백운우체국―백운로터리―대동고―대광여고―대주아파트―대성여고―동성고―백악관예식장―남선산업―인성고―송암동―향등―지산―양과동―이장1동―이장2동―복수―포충사―원산―상지석―하지석―대촌―상촌―하촌―무학초교―학승―월성―화장동―지동―농막―시산―석교삼거리―용두동―봉학―용두입구―서창파출소―문촌―도호―신야촌―신광―구야촌―장암마을―공항입구―송정파출소―공원입구―광산구청―송정리역―산동사거리―송정서초교―도산파출소
버스 시간대(지산유원지 방면): 오전 6시20분·10시, 오후 1시50분·5시40분·9시30분(배차간격 225∼240분, 소요시간 100분)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