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동 `민예공방’

한때 목공예품들이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 경제가 부동산 경기로 흥청이면서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던 80년대다. 이전에는 개념조차 없던 인테리어가 사업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목공예품들의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치부되던 목공예품들이 일반에 조심스럽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목공예 책상이나 바둑판, 장식품들이 인테리어 용도로 거실 중앙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석동의 민예공방은 1980년에 문을 열어 지금껏 24년의 시간을 목공예 공방으로 버텨왔다. 주인 정종구(48)씨는 수입산 목공예품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한 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국산 재료만을 사다가 직접 제작한다.
“지금은 목공예 공방들이 기껏 서너 군데 남아있지만 옛날에는 숫자가 솔찬했제. 전부다 수입산 띠어다가 파는 가게들로 변해부렀어. 손수 만드는 사람은 인자 얼마 없어.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전부 오늘 낼 할 것이여. 물건이 나가덜 안항께.”
민예공방이 가장 잘 나갔던 시절은 80년대다. 현재는 정씨 혼자서 만들고 파는 일을 병행하지만 그 시절에는 점원을 서너 명 둘 정도로 목공예품이 잘 나갔다. 한국 사람의 유전자 자체가 목공예품을 좋아하는 데다 경기까지 호황이어서 만드는 물건마다 주인을 찾아갔다.
목공예품들이 차츰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 것은 수입산이 들어오면서부터다.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중국산이 주류를 이루는 수입품은 국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시장을 평정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덩달아 경기까지 침체되면서 수요가 뚝 끊겼다. 목공예품은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도 있지만 대부분 고가이기 때문에 경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수입품 들어옴서부터는 계속 내리막이제. 힘들게 만들문 뭣할 꺼시여, 뭐가 팔리들 않는디. 요새는 한 달에 한 개도 안 나가는 때도 많고 어쩌다 주문이 들어와도 돈 만지기 힘들어. 수입산이 판을 친께 국산도 가격이 삼십 프로는 떨어져부렀제. 나무 값이 워낙 비싼께 포도시 인건비나 건지제.”
가게가 오랜 시절을 버티다 보니 단골은 꽤나 많은 편이지만 매출의 파급효과는 거의 전무하다. 목공예품 자체가 일상용품이 아니다보니 단골이라 해도 몇 년 만에 한 번 찾아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목공예는 연장이 생명이다. 정씨는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썼던 연장들을 대부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남이 빌려 달라 해도 절대 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쉼 없이 손질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돈 벌라고 가게 했으문 진즉에 때려 치웠겄제. 학교 졸업하고 해 본 일이 요것밖에 없고, 인자 누가 할라고도 안항께 붙들고 있는 것이제. 쩌 연장들 보고 있으문 나무 손질하고 살았던 시간이 전부 기억나제.”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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