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동 `계림종합싱크’

가게가 문을 연 지 20년이 지났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간판만은 질긴 시간을 그대로 간직했다.
가게 앞과 옆면으로 네댓 개의 간판이 걸렸는데 글자가 다르다. 어떤 것은 처음 그대로인 반면 어떤 것은 아크릴판이 세월에 떨어져나가 자음과 모음이 제각각이다.
계림동 `계림종합싱크’의 역사는 주인장의 맏이와 함께 한다.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갓난아기였던 맏이가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주인 김재선(51)씨는 “요 가게서 팔려나간 싱크대가 암만 못 되야도 몇 천 개는 될 꺼신디, 고놈으로 키운 애가 지금은 낼모레 결혼시켜도 될 만큼 커부렀다”고 말했다.
지금은 웬만한 시골집 부엌에도 싱크대가 놓였지만 한때는 그것이 부엌의 혁명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가마솥이 우리네 부엌에서 사라진 때가 그리 오래지 않다. 싱크대가 광범위하게 우리의 부엌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이다. 전국을 흥청이게 만들었던 부동산 열풍이 집 안으로 옮겨오면서 싱크대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부터는 그 열풍이 시골로까지 번졌다. 영암, 해남, 보성, 고흥으로 하루에도 수십 대의 싱크대들이 실려 나갔다. 입식부엌 열풍은 산골과 섬마을을 가리지 않았으니 가게를 출발한 싱크대는 매일 산을 넘고 몇 시간 뱃길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신안 어디 섬이고 아무리 먼 길도 안 가본 디가 없어. 입식부엌도 고 시절에는 유행이었제. 한 집이 하면 금방 다른 집이 따라서 하고, 그때사 모도 묵고 살만 하니까 무지하게 팔렸지. 글고 당시에는 전부 와서 사들고 가지 배달이란 게 없어. 하루에 못 나가도 다섯 개는 팔리는디 일일이 배달하면 도로에서 시간 다 보내지.”
가게는 광주 도심에 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손님의 9할이 시골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골은 상대적으로 경기에 민감하지 않아 IMF에도 장사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가게들은 손님이 팍팍 떨어지는 게 눈으로 보였지만 계림종합싱크는 90년대 후반까지도 여전히 장사를 잘 했다.
“아엠에프가 뭐신지 우리는 알 턱이 없제. 촌사람들이야 경기가 좋건 안 좋건 별반 다를 것이 없잖아. 그때는 물건이 없으면 없었지 손님이 없는 적은 드물었으니까.”
침체의 시기가 찾아온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다. 15년에 걸쳐 웬만한 시골집 부엌으로 모두 싱크대가 들어가다 보니 더 이상의 수요가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은 최초에 싱크대를 들여놨던 사람들이 간혹 교체하는 정도다. 주문이 줄면서 최근에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입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변했다. 예전에는 직접 광주까지 올라와 사가는 게 예사였지만 현재는 배 타고 한참을 들어가는 섬마을도 배달에 설치까지 해준다.
“세상이 변하면 변한 대로 적응하고 사는 것이지. 주문이 옛날의 이십 프로 정도인디 묵고 살라면 어디든 찾아 다녀야제. 생각하문 튕기고 장사하던 시절이 그립기는 하제.”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