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번 버스 타고 `극락강역’ 가기

▲ 극락강역 역사(驛舍)는 1958년에 재건축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해왔지만 오는 5월 신축공사를 할 계획이다.
 `과외 구함’ 굵은 신명조체로 또박또박 학력과 과외 경력을 적어놓은 A4용지. 버스정류장 한켠에 여러 장의 A4용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문득 `방학이 시작됐구나!’ 싶어진다. 방학! 스케치북을 펼쳐 일일계획표를 그리며 `취침’ `공부시간’ `학원 갈 시간’ 등을 눈치껏 구겨넣다 일기장에는 `하고 싶은 일들’만 빼곡히 적었던 때. 그 목록에는 여행이 필수 항목으로 들어가곤 했다. 혼자만의 여행이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던 시절, 늘상 타고 다니던 버스와 달리 기차는 `낯섬’ 그 자체였다. 일상의 탈출구였던 기차역을 찾아 버스를 탔다.
기차 여행에 설레던 마음 돌이켜 보며-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보다 기차 여행에 설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극락강역을 찾아냈다. 385번 버스는 아파트 단지를 지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겹겹이 세워진 거대한 직육면체가 콘크리트산 같다. 방학을 맞은 오후의 버스는 시내로 나가려는 청소년들로 북적댄다. 버스가 중앙대교를 건너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태평극장을 지나가자 자리에서 대부분 주섬주섬 일어선다. 충파에서 멈추자 다들 핸드폰을 꺼내들곤 도심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버스는 양동시장을 거쳐 광천터미널로 향한다. 극락강역까지 남은 정류장을 세어보다 “한참 남았는데…”라는 옆사람의 말에 슬며시 긴장이 풀린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보니 버스는 벌써 극락강역에 닿아 있다.
 다른 역과 달리 두 개의 시멘트 공장이 역 주변에 있다. 역사(驛舍) 근처에 있을 법한 `○○다방’ `△△약국’ `□□여관’ 등이 보이지 않는다. 읍내에 위치한 역에 비해 극락강역 주변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는 극락강역이 외지로 나가는 창구 역할보다 `이동’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선(경상도―전라도)를 잇는 극락강역은 주로 목포나 나주, 함평 지역으로 출퇴근을 하는 고정 승객들과 동양·현대 시멘트 공장의 화물이 주요 고객이다. 길목에서 보이는 극락강역은 대합실로 적힌 한자어 대신 `맞이방’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곤 세월의 흐름을 비껴선 듯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간이역으로 오해 말라”-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철도와 역사는 한국고속철도 KTX가 도입되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빠름과 서비스를 강조한 고속철도는 승객들의 편리를 극대화한 시설로 재건축해 시각적 이미지부터 강화시켰다. 변화의 선두는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역사(驛舍). 극락강역은 이 대열에서 잠시 제외된 상태지만 유보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오는 5월이 되면 극락강역도 달라지게 된다.
 1922년 세워진 극락강역은 1950년쯤 소실됐다가 1958년 재건축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졌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20평도 채 되지 않는 맞이방에는 긴 나무의자가 벽과 맞물린 채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극락강역은 통근열차 통일호와 화물수송 열차만 정차하는 곳이라 아침과 저녁에만 북적댄다. 분주한 시간대가 아닌지라 맞이방은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들릴 것 같다. 이런 적막함이 누군가에게는 극락강을 간이역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지만 분명코 간이역은 아니다. “그동안 일했던 역만 나열해도 전국 철도 지도가 나올 것”이라며 껄껄 웃는 최용욱(53)씨는 “기차역은 역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보통역과 간이역으로 나뉜다. 역장이 일하는 극락강역은 송정리역처럼 보통역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극락강역에서 일하는 승무원은 현재 7명이 두 개 조로 나눠서 24시간씩 일을 한다. “밤에도 기차는 지나가지 않느냐”고 운을 뗀 김양옥(47)씨는 “일년에 절반을 기차역에서 지내는 통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가족보다 때론 더 가깝다”고 웃는다. 옆에선 “밤에 들어가니까 마누라도 몰라보더라”고 농을 건네며 업무의 고단함을 달랜다.
시대 달라지면서 변화 흐름 속에- 2005년 1월1일부터 철도청에서 철도공사로 바뀌게 되면서 역도 달라지게 되었다. `서비스’ 기능을 강조한 업무는 그들의 모자를 벗겼다.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모자까지 쓰면 군인처럼 딱딱한 인상을 준다는 판단에 올해부터 모자를 쓰지 않게 됐단다. 그외 수신호도 하지 않게 됐다.
 이범주(45)씨는 “이전에는 기차가 오면 직원이 직접 깃발을 들며 수신호를 했지만 올해부터(시스템을 가리키며) 관제탑에서 무선을 통해 철도 운행을 점검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직접 신호를 보내야 했던 시절에는 담당직원이 필요했지만 이제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과학의 진보일 수 있지만 편리한 시스템은 때론 인원 감축으로 이어진다. 달라진 것은 또 있다. 예전과 달리 운임체계도 혜택이 줄어들었다. 장애인 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할인율이 대폭 줄어든 것.
 김병기(41)역장은 “고속철도가 항공편 못지 않은 신속함과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그동안 `서민들의 발’이 됐던 기차의 역할을 다하진 못한다”면서 “한 세기 동안 국영철도로 운영됐지만 이제 수익창출을 고려해야 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고객 만족과 이윤 둘다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직원들은) 있다”고 말했다.
 `현대화’는 `진보화’ `기술화’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터. 현대화가 낳은 이기와 편리는 시간을 일분 일초 앞당길 수 있겠지만 익숙해지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변화의 흐름에 서있는 극락강역을 보면서 자꾸 돌아보게 된다.   정현주 기자 ibox@gjdream.com
 ▶385번 (매월동-신가부영아파트 방면), 배차간격: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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