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년의 나이에 걸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집은 전혀 낯선 곳이 아니다. 특히 꽃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으레 “어! 그 집이 아직도 있어?”라고 반문하기 마련이다.
 꽃집 문을 열 무렵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막내아들이 지금 삼십대 중반을 넘어섰으니 그 집이 지나온 세월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역사로만 따진다면 현재 광주 바닥에서 꽃집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 중에는 따라올 자가 없는 집, 대인동에서 38년의 시간을 견뎌낸 `푸른화원’이다. 가게와 함께 젊은 세월을 모두 보내버린 주인 김소은(70)씨는 이제 `할머니’ 소리가 귀에 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사실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 꽃은 곁다리이거나 들러리였다. 남편이 차린 조경가게 한 켠에 꽃화분 몇 개 들여놓은 것이 그 미약한 시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꽃 수요가 늘면서 조경이 오히려 뒷전으로 물러났다. 당시는 광주를 통틀어도 꽃집이 10곳을 넘기지 못했던 시절. 당연히 `푸른화원’의 문턱도 닳고 닳았다.
 “우리 집에서 상대 안 해본 관공서와 학교가 없을 정돈께 옛날에는 엄청 잘 되었다고 봐야제. 원래는 조경이 전문이었는디 꽃집으로 평생 벌어 묵었응께. 글고 지금은 요 자리가 한물 가부렀제만 그전에는 엄청 사람이 많았었제.”
 대인동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던 시절 그 길은 무수한 사람들로 항상 붐볐었다. 더구나 꽃은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품목. 80년대 경기야 단군이래 최대였으니 꽃도 무척 많이 팔려 나갔다. 꽃이 없어서 못 팔았을망정 손님이 없는 적은 없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주에 꽃집도 별반 없고, 인근에 꽃 농장을 찾을 길이 없다보니 꽃을 구하는 게 일이었다. 당시에는 서울까지 올라가 꽃을 구해오는 게 보편화돼 있었고, 부족한 물량은 전남대 농대나 각 농업고등학교에서 구해왔다.
 주문이 많다보니 배달도 일이었다. 요즘은 택배가 등장해 배달이 쉬워졌지만 그때는 대인동에서 각화동까지 배달하는 일도 흔했다. 때문에 다섯 명의 점원을 두었던 시절도 있었다.
 “새벽에 전남대 가서 꽃 구해다 가게에 갖다 놓고 오전 열 시에나 나주 농장 다녀오면 벌써 꽃이 다 팔렸어. 날마다 잠 못자고 일해도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제. 그때 여기 다녔던 사람들이 지금도 가끔 온디 이 나이에 아직도 꽃집하는 거 신기해라 하지.”
 푸른화원은 꽃뿐만 아니라 꽃꽂이로도 이름이 높다. 김씨는 광주에 꽃꽂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70년대 초반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오가며 기술을 배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가 가르쳐서 꽃꽂이 강사가 된 사람만 50여 명이 넘고, 제자는 1000여 명을 헤아린다.
 “지금은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주문 한나가 안 들어오는 날도 있어. 그래도 즐거워. 인자 완전 할머닌디도 꽃만 보문 기분이 좋아져.”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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