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힘주고 살았는디…”

▲ 마을입구의 각시바우.
대촌면장은 구례군수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자리였단다. 지리산 첩첩산중에 비겨 곡창 대촌들녘은 그만큼 탐낼 만 했다.
대지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사차(75)할아버지의 풍요의 증언은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곡창을 탐낸 일본인들이 이 마을에 많이 들어와 살았다”는 것. 한 때 그들이 거주했던 일본식 집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모두 개량해 옛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대지마을은 개울을 경계로 상촌·중촌·하촌으로 나뉘는데, 각각 이씨·임씨·송씨들이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또 각 촌엔 범상치 않은 당산나무가 버티고 있다. 300년생 느티나무로 상촌에 3그루, 중촌과 하촌에 각각 1그루씩이다.
조씨 할아버지는`근동에서 유래가 없다’는 고시합격 5명의 배경을 등용산에서 찾았다.
“머리 쪽이라 더 효험이 있었을까?” 용머리에 해당하는 하촌에서 3명, 꼬리 부분인 상촌에서는 2명의 합격자가 나온 것을 빗댄 말이다.
상촌마을 입구의 각시바우도 마을의 부흥을 거들었다.
아낙네가 기도하는 형상을 닮은 이 바위에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복락을 빌고 있다.
전성기땐 350가구가 지지고 볶았던 마을은 이제 200여 호로 줄었다. `목에 힘주고 살았던’ 때를 떠올리는 조씨의 낯색이 공허롭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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