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풍년<편집국장>
80·90년대 이야기다. 대도시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은 애간장을 녹였다. 특히 데모 잘하기로 유명한 대학이라도 다닌다면 맘 편할 날이 없었다. 틈만 나면 “니는 데모 같은 거 안흐제?” 하며 단속을 했다. 학생들 입장에선 거짓말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피땀으로 농사지어 학비를 대는 부모가 아니던가. 민주화니 독재 타도니 하는 명분일랑 불효였다. 차라리 시치미를 뚝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땐 정말 시위가 전쟁 같았다. 행여 시위에 나갈라치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했다. 교문 밖으로 진출해 도로를 가로막기 일쑤였다. 관공서나 정당 당사를 점거하기도 했다. 더러는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하기까지 했다. 돌멩이 화염병 쇠파이프 최루탄 …. 일년내내 지긋지긋했다. 그때도 과격시위는 용서 못할 범죄였다. 이른바 제도권은 언제나 ‘평화적으로 주장하라’며 시위대를 질타했다. 일부 언론들의 곡필은 가히 눈뜨고는 못 봐줄 지경이었다. 서슬 퍼런 독재권력에 평화적 주장이 가당키나 했으리. 그들 또한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나마나한 논리로 권력의 구미를 맞추었던 것이다. 만약 그 시절에 모든 학생들이 부모들의 바람처럼 공부만 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부지! 절대 데모 같은데 나가지 마씨요. 아부지는 늙었응 깨 좀 빠져도 누가 뭔 말 안흐꺼시오. 그렇게 나다니다가 다치기라도 허믄 어찔라고 그라요.”
“그라믄 가만히 있을 꺼시냐? 인자 농사지어선 다 망하게 생겼는디. 그라고 죄다 노인들인디 너도나도 빠져불믄 누가 허꺼시냐.”
부모자식 사이는 언젠가 뒤바뀐다더니. 서울 사는 친구는 매일같이 칠순 아버지를 잡도리 한단다. 헌데 그 푸념을 듣자하니 마치 한 세월이 훌쩍 앞으로 당겨진 듯 하다. 달라진 것은 애간장을 녹이는 쪽과 녹는 쪽이 정반대다. 또 노인은 굳이 데모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이며 벼랑 끝에 몰린 평생의 업을 지키려는 절규다. 예전처럼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고 감옥에 넣을 세상은 아니라는 믿음도 깔고 있다. 또 자신들의 외침을 들어줄 이 사회 제도권에 대한 기대심리도 없지 않을 게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다. 도시에 뿌리내린 자식 세대들은 귀를 닫아버린 형국이다. 지역언론마저도 일부 폭력을 빌미로 농민시위에 부정적 이미지를 씌운다. 한 고위 공직자는 광주항쟁 때도 시청은 무사했다며 호통이다. 농민들의 죽봉은 동학군의 죽창 같은 정당성이 없다는 지적부터 ‘무관용의 원칙’까지 나왔다.
사실 농촌과 농민에 기대어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광주인데. 대책 없이 평화를 얼러대던 옛 모습을 보는가 싶어 걱정이다. 유리창을 깨부순 건 스스로도 인정하듯 잘못이다. 허나 한편으론 자치단체도 자성해야한다. 선거 땐 뭐든 해줄 듯 했는데. 한미FTA 문제는 정부 몫으로 돌리며 나 몰라라 하고 있지 않나. 80년의 역사를 보자면 시청도 시위대 편이었다. 지금 시청은 농민들에게 과연 무엇인가 말이다.
또 작금의 농민시위를 불온시하는 관점으로 동학군을 정당화하는 건 넌센스다. 당대엔 동학군도 관아를 습격해 관리를 죽이고 국고를 약탈한 역적 무리였다. 제도권의 시각이란 늘 오판하기 십상인 게다.
게다가 한미FTA 협상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현 정권이 하는 일 대부분이 잘못이라고 야단치는 언론이 아닌가. 유독 대미정책에만 관용을 베푸는 까닭을 돌아봐야 마땅하다. 사소한 일탈까지 적용되어야할 무관용의 원칙이라면. 농업은 물론 나라까지 결딴날지 모르는 정권의 일탈에 우선 무관용을 들이대야 맞질 않나.
‘데모말고 공부’를 외던 부모들인데. ‘데모말고 농사’를 주문할 수 없으니….
 hwpoong@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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