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그리움’ 땅에 눕다

▲ 섬진강 지류가 보에 막혀 얼음을 깔고, 나무는 얼음 위에 누웠다. <전라도닷컴 김태성 제공>

바람은 차고 아직 봄은 조금 멀다. 새벽이면 기온은 영하에 더 가까워 보에 막힌 강물은 살얼음을 깔고 있다.

봄볕을 찾으러 섬진강 강물을 아래에서부터 따라 올라간다. 강물 옆 논과 밭들은 비어있다. 다가올 노동의 시간을 담담하게 기다린다. 오랜 시간을 타고 내려온 전통이며 몸에 밴 습관이다. 땅은 봄이 살며시 땅에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농가는 농사 준비를 시작한다. 겨울의 침묵에서 깨어난다.

봄볕이 모래알처럼 아주 미세하다. 가늠할 수 없는 빛의 크기이지만 작은 온기를 퍼트려 세상을 깨운다. 섬진강, 오랜 세월을 농부들과 함께 흘렀던 저 강바닥으로 봄을 알리는 여린 빛이 당도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송사리가 보인다. 떼를 이루진 않았지만 먹이를 찾아 움직인다.

곡성 땅 석곡을 넘어 섬진강이 여러 지류를 합쳐 몸을 불리는 압록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섬진강은 아래로 갈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사람과 가깝다. 강이 세를 결집하면 사람의 삶도 그 근처로 모인다. 압록에 닿기 전 살며시 길을 바꾼다. 당도한 곳은 곡성 목사동면 신전마을이다.

비탈진 산자락에 눌러앉아 수 백년을 이어온 마을이다. 처음 사람의 마을을 연 이들은 ‘엄’씨 성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타성이다. 그곳에서 시간은 무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오래된 시간들이 지금껏 현존한다. 돌담길이 길게 이어지고 전통의 결을 잇는 한옥들이 지층 같은 세월로 서 있다.

마을의 담 전체가 돌로 만들어져 있다. 거친 산을 다듬어 마을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온 돌들을 그대로 쌓아 담을 만들었다. 살아내기 위한 담이다. 돌담의 길이를 한 줄로 세운다면 족히 10리는 이어질 듯한 돌담의 도열이다. 마을의 담장인데 흙과 돌을 버무려 쌓았다. 집은 흘러온 시간을 아주 잊어버린 듯 전통의 서민 한옥 그대로다.

이 무렵이면 곽재구의 시가 사람에게로 온다. <헛간에 누워 있는/ 녹슨 삽이며 괭이/ 그것은 살아 있는 그리움/ 우리들 마음의 깊은 바람결에/ 쓸려가는 봄들판 새하얀 풀꽃송이/ 녹슨 삽자루 닦고 있노라면/ 봄바람 같은 것이/ 풋풋한 산흙냄새 같은 것이/ 날 푸른 햇살로 가슴에 와 맺힌다> (곽재구 ‘농구를 닦으며’ 중)

봄이 오면 아낙들은 겨우내 쌓인 집안의 먼지를 털어 낸다. 남자들은 농기구를 꺼내 손질한다. 삽날의 녹을 벗겨내며 농부들은 정말로 ‘살아있는 그리움’을 느낀다. 그것은 흙의 숨결을 아는 자의 마음이며 평생 논과 교감한 몸의 말씀 같은 것이다.

“지금은 기계가 좋아서 촌에 요즘은 거의 없어. 근디 우리 마을은 이 무렵에도 솔찬히 바쁘제. 배로 묵고 사는 사람들은 겨울이고 봄이고 항시 마음이 배나무 옆에 있어. 가지치기하고 비료 낼 준비도 해야 한께.” 신전마을 주민 박상길(68)씨의 말이다.

봄이 온다. 씨 뿌리고 추수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를 찾던 태양의 기록도 점점 시간의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이제 새날이 올 것이고, 살이 있는 것들의 간절한 그리움은 신전마을의 땅에 눕는다.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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