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조승기

▲ `각자의 집’

 작가를 만나러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지하 공간으로 들어간다. 조각을 하는 조승기 작가는 여전히 ‘밑’에서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대인시장의 좁은 골목길 안 지하 공간은 요즘 그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공간. 이름 조차 ‘밑에’의 발음 그대로를 적은 ‘미테’는 그를 포함한 작가 6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전시공간이다.

 작가를 빛나게 해주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는, 그저 젊은 작가들의 진정성과 고민 만이 자체 발광하는 곳…이라고 적고 보니 작가의 지청구를 들을까 살짝 고민된다. 왜냐면 그곳에서 만난 작가는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인터뷰 같은 거 안하려고 했는데…. 예전에 한번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낯이 굉장히 뜨거웠어요. 너무 좋게 써주신 거예요. 이건 원래 내가 아닌데…너무 꾸며진 것 같아서요.”

 포장되고, 부풀려지고, 온통 휘황한 것들이 ‘위’를 점령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작가가 밑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보다가…. 단지 “임대료가 싸서 지하에 있다”고 항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화려함 속의 밑바닥

 그의 작품에서도 밑바닥을 본다.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반짝이는 도심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같다. 쓸쓸하고 공허하다. 욕망을 좇아 정신없이 매달리지만 정작 자신이 왜 공허한지 알 수 없다. 관계는 어긋난다. 좌절된 욕망 사이에서 심성은 황폐해진다. 그런 우리의 삶에 시니컬하게 조소하다가 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결국 나의 이야기고 우리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미테’ 입구에 놓아둔 거의 실물 크기의 사람 조각도 그러하다. 몸매가 드러나는 붉은 산타 복장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성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든다. 웃고 있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품의 제목은 ‘For Sale’. 자신을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그녀는 그 화려한 밤이 가고 어느 후미진 골목의 작은 보금자리에 누워 밤새 뒤척일지도 모른다.

 마천루 처럼 수직으로 뻗은 투명 아크릴 지붕 위에 사람들은 허공을 보거나 아래를 본다. 섞이지 못하고 자신 안으로 침잠한다. 그의 작품 안에서 사람들은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우리 사는 세상은 닫혀있더라”는 작가는 ‘각자의 집’을 생각했다.

 세상은 또 참 춥다. ‘어서오십시오’라고 반기는 곳은 사람보다 ‘돈’이 머무는 곳이며, 우리가 맺는 관계의 상당 부분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관계일 확률이 크다. 추운 마음에 찾게 된 옛 살던 집은 현대적이지 않은 관계로 방치되거나 철거될 대상일 뿐. 도심에서 위로받을 고향은 더 이상 없다.

 

 야구선수의 꿈을 접고 조각가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도 그럴 듯 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가 미술을 접한 계기는 심지어 전혀 감동적이지 않다. 못 말리게 말썽을 부렸던 중학생인 그가 하필 갇힌 곳이 ‘미술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그는 야구선수였다. 해태 타이거즈가 전설이었던 시절이었다. 꼭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하다 형한테 들켜서 많이 혼났다. 해태 야구선수들을 쫓아 경기장으로 다녔고, 해태 선수들의 전용 목욕탕을 알아내 선수들 등을 미는 것이 재미였다. 김봉연 선수의 배팅 연습을 돕기도 했다. 투수였던 친구와 그는 야구 명문이었던 무등중학교로 진학하기로 했었다. 그러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가 야구 물건들을 모두 태우고 묻어버렸다. 결국 야구를 하지 못하고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다. 반항심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 수업을 안들어가고, 아이들을 괴롭히고, 어쩌다 수업 시간에 들어가도 몸만 거기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와 담임 선생간의 일종의 ‘합의’가 이뤄졌다. “너무 심란했던” 그에게 야구 대신 미술을 시켜보자고 했다. 선생은 그를 미술실에 있게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장난하듯 낙서하듯 그림을 그린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 때 왜 내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아닌 것 같아요.”

 말썽부리고 반항기 많았던 유년 시절을 통과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 형편은 기울기 시작했다. 여전히 학교는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다. 고3 담임은 결석일수가 많다는 이유로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갔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나르고, 다방에서 청소를 하고, 물류창고·인쇄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돈을 벌어서 입시학원과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다 영장이 나왔다. 포기하고 군대에 가려고 광주로 내려왔다. 미술학원을 했던 한 선배는 “노느니 그림이나 그려라”하며 미술학원에 머물게 해줬다. 대학에 가면 군대를 미룰 수 있다고 미술학원의 후배들이 귀띔해줬다. “대학을 한 번 가볼까” 생각했다. 그 때부터 3개월 동안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다. 학원 친구들이 요점정리를 가져다 줬다. 선배들이 조각을 가르쳐줬다. 하루 두시간 자고 그림을 그렸다. 나이 23살, 대학교 1학년이 되었다. “네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던 어머니의 소원은 성취되고도 남았다.

 대학은 갔으나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재료비도 만만치 않았다. 학교도 괴리감이 느껴졌다. 자퇴를 하고 돈을 벌었다. 꼭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니…. 그런데 자꾸 공허했다.

 “돈은 버는데…. 자꾸 헛배가 부르는 것처럼 만족이 안됐어요. 그 때 작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 때는 출구가 없었다. 돈도 없었다. 이것 저것 공모전에 참여했다. 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일이 많았다. 선배들이 걱정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 그러다 졸업할 때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터전을 잃었다. 갈곳이 없어졌다. 시골로 내려가서 6개월 동안 천장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끌고 나온 건 또 사람이었다. 그러다 또 사람에 실망하기도 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작업을 하고 개인전을 열었고 결혼을 했다. 대안 공간을 꿈꾸며 갤러리를 열었다. 중학교의 작은 미술실에서 시작됐던 미술과의 인연이 참 많은 길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

 











 ▲`월산동 382번지’



 밑에서 위로

 시간의 길이에 비해 굴곡이 많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성격도 바뀌어 버렸다. 말수는 없어지고 차분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보여지는 모습일 뿐. ‘다소 심각하고 어둡고 시니컬 해 보이는’ 그 밑바닥엔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역의 작가들이 너무 쓸데없이 어두운 것 같다”라는 말을 했을 때도 그렇고 “즐겁게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런 암시가 읽혔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항상 어디로 떠날 생각을 한다.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싼 항공권 구하기, 가장 싼 숙소 구하기의 달인이 됐다. 신혼여행으로 배낭 여행을 떠났다.두달 동안 육로로 이동하며 다녔다. 트럭의 화물칸에 누워 비포장 도로를 8시간 동안 이동한 뒤 숙소에서는 ‘사랑하는’ 아내와 몸떨림 증상을 공유했다. 가진 것 없어도, 때론 외롭거나 공허해도, 여행은 늘 충전과 성장의 시간을 줬다.

 “세상을 사는 데 참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나하고 다르면 이해를 못했는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런 것들이 없어졌어요.”

 열정 가득한 작가들을 만나는 것도 그에게 자극을 준다. 힘들다면 힘든 시간의 터널을 통과한 그에게 현재 그 터널을 똑같이 통과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돕는 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다. 올해 11월 졸업작가들을 선정해서 지역의 이론전공 학생들과 연계해 매달 한 달에 한 번 워크숍을 갖고 개인전을 갖도록 하는 구상을 세우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람이다. 개인적인 작업도 준비해야 한다. “철 값이 너무 뛰어버려서 철을 이용한 조각을 접어다”고 했지만 다시 금속 작업을 준비하려고 한다. “가장 잘 할 수 있고 잘 아는 것”이 금속 조각이라고 했다.

 갤러리 ‘미테’의 ‘위’(정확히는 위의 맞은편)에는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작가의 작업실은 ‘공사판’ 같다. 정말 작업실이 맞냐는 질문에 “원래 조각하는 사람들 작업실은 다 이렇다”는 설명이 붙는다.

 어찌됐건 당분간 작가는 ‘밑’과 ‘위’를 오갈 듯 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은 결코 어둡거나 시니컬 한 것은 아니라는 말. 작가는 부인하겠으나 그래도 ‘여전히 뭔가 있어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글=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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