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위에 새긴 말, `민주주의’

 누구에게나 ‘빚 감정’이 있다. 어떤 부채는 평생을 두고 갚아도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살아 있음이 죄가 돼서 빚은 그 크기를 자꾸 늘린다. 늘 삶의 가장자리로만 조심히 걸었다. 그 날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고인다. 신은 죽었고, 하나님은 거리의 죽은 얼굴들 속에서만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30년, 그에게는 ‘일생’ 같은 시간이었다. 80년 오월 그 봄날이 지나간 후 그의 삶은 정지했다. 그가 쓰는 시도 정지했다. 그 봄날의 흐름 안에서만 그는 살아있었다. 그 봄날에 관한 500편의 시를 썼다. 때론 증언이었고, 절규였으며, 온갖 흐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직 맺힌 게 많다. 먼저 간 죽음들에게 갚아야 할 것도 많다. 어느 봄날 그는 썼다. <금남로는 사랑이었다// 내가 노래와 평화에/ 눈을 뜬 봄날의 언덕이었다>고. 그 해, 금남로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80년 오월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깎여지고 망가지는 오월을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봄날이 가진 정신의 가치에 대한 폄훼는 심각했다. 그가 판단컨대 단순한 음모가 아니었다. 정치가 개입됐고, 인간에 대한 예의는 실종돼 있었다. 모든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고, 그는 오월 정신을 다시 진심의 자리에 놓고 싶었다. 그래서 공모에 응했고,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됐다. 김준태, 그의 내부에는 오월에서 다시 오월로 흐르는 강이 있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980년 5월21일 가톨릭센터 앞, 그는 거기 있었다. 계엄군이 발포를 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것은 전쟁이었고, 그는 넋을 잃었다. 핏물이 금남로를 붉게 적셨다. 지혈을 해도 피는 멈추지 않았고, 부상자들을 엎고 뛰었다.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했다.

 그리고 운명의 6월2일이 온다. 오래 휴간됐던 광주의 신문들이 그 날 발행을 시작했다. 전남매일에 근무하는 소설가 문순태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시 한 편을 부탁했다. 그는 당시 전남고 교사였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50분, 그는 150행의 시를 썼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검열에 걸려 원문의 80%가 잘려 나갔지만 그의 시는 전남매일 6월2일자 1면에 실렸다. 언어로 80년 오월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그 시, 제목은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였다.

 “내 이름을 달았지만 내가 쓴 게 아니야. 내 정신이 아니었어.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광주가 쓴 거야.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금남로와 도청에서 죽은 귀신들이 내 몸 속에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대필을 하게 만든 거지. 나는 지금도 그 시는 영혼들이 쓴 거라고 믿고 있어.”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만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김준태의 시는 신문에 발표된 지 하루 만에 세계 곳곳의 언론에 실렸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곧 광주의 실상이었다. 시를 보고 세상은 광주를 알았다. 그 잔인한 봄날을 목도했다. 고립의 도시에서 진실을 알리는 시를 썼으니 탄압은 자명했다. 그는 일단 몸을 피했다. 거의 한 달 동안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을 떠돌며 도망 다녔다. 두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잠깐 집에 들렀는데 5분 만에 체포됐다. 그가 끌려간 곳은 광주 보안대, 보름 동안 모진 고문이 가해졌고 다니던 학교의 사표를 전제로 그는 풀려났다.

 

 “민주주의 나무 가꿔 나가겠다”

 돌아보면 참 질긴 세월을 살았다. 대신 많은 경험을 쌓았다. 해직 되고 밥벌이를 위해 학원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몇 년 후 복직이 됐지만 교사인 그에게 보직을 주지 않았다. 학생을 가르칠 수 없는 교사였다. 빈 책상만 지키는 현실이 참담했다. 그는 결국 다시 사표를 내고 신문사로 향했다. 대학 강단에도 섰다.

 결국 경험이 그를 5·18기념재단 이사장의 자리로 불러냈다. 시간은 간혹 무서운 것이어서 지금 80년 오월의 자리가 위태롭다. 내부의 균열도 심각하고, 외부의 흔들기 역시 무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얽힌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자리를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지 않을 사람이어야 했다. 오직 80년 오월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고된 정신적 노역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김준태다.

 일이 쌓여있다.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긴 대립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 도청별관 문제도 풀어야 하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오월단체들의 통합 문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보수단체들의 오월 정신 왜곡은 심각한 수준에 닿고 있다. 이 복잡한 구도를 그는 어떻게 풀어낼까? 그가 제시한 해법은 진실이다.

 “진실이 여기 있는데, 폄훼를 한다고 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80년 오월에도 그랬잖아. 신군부는 광주를 고립시키고 총칼로 막았지만 결국 진실은 세상으로 퍼져 나갔어. 순식간에 세계가 광주의 참상에 집중했지. 안상수 상석 사건이나 지만원의 폄훼발언은 그냥 구정물일 뿐이야. 민주와 평화·인권에 담긴 진실을 꾸준히 견지하면 돼. 인터넷 홈페이지를 국제화시킬 거야. 국제사회와 연계해서 우리의 가치를 세상에 심는 거지. 광주는 민주주의 나무야, 잘 가꿔 나가야지.”

 

 할머니에게 배운 ‘밭’의 정신

 그는 ‘밭’의 시인이다. 그는 밭 안에서 삶을 건졌다. 밭은 모든 생명을 함께 품는다. 김준태는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에 가담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고향 뒷산에서 생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세 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 또한 명이 길지 못해 김준태가 아직 소년이던 열 살 무렵 세상을 등졌다. 그 때부터 그를 지켜주는 하늘은 오직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그에게 건네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생명이었다. 생명을 여는 밭, 80년 오월도 다르지 않았다. 그 날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밭을 품었다. 그 밭에서 자란 것은 민주주의였다.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금남로에 섰던 사람들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인간다운 세상에서 살고자 했다. 결국 금남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밭으로 갔다.

 그도 사람이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일의 무게를 생각하면 가끔 두렵다. 그러나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재단의 산적한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도 생명의 밭이 가진 품의 넓이에서 비롯된다. 오월단체들의 통합 논의만 해도 그렇다. 통합의 움직임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반목과 갈등 구조에 놓여있다. 사람들은 그 갈등 속에서 분열을 읽어내지만 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

 “80년 오월을 한 뿌리로 두고 있지만 오월단체들은 모두 태생이 달라. 하나의 사건으로 5000명을 회원으로 둔 곳은 오월단체밖에 없어. 따지고 보면 분열된 것이 아니라 각자 별도로 태동한 거야. 그것을 하나로 합치려는 것인데, 단체의 입장도 다르고 소속된 개인의 생각도 다 달라. 넓게 봐야 해. 오월정신이라는 큰 틀에서 먼저 하나 되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통합은 될 거야. 문제는 조급함이지.”

 그는 지금 나무를 심는 심정이다. 80년 오월은 나무였다. 그 나무에는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열매가 자라야 할까? 오래 고민할 것이 없다. 30년의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주의’다. 거기 닿기 위해 금남로와 도청에서 광주는 목숨을 버렸고, 살아남은 자는 지금껏 맞서 싸웠다. 다른 거 없다. 오월은 목숨의 진실 위에 핀 꽃이다. 그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 밭 위에 ‘민주주의’라고 썼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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