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나부터 시작하라”

 죽음. 갈등.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태그를 붙여 본다면 이 두 단어가 되지 않을까.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스런 과정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강제종료다. 강제종료시키는 것은 ‘돈’이다. 돈의 논리가 여러 생명을 강제 종료 시킨다. 죽음들이 너무 많아 이젠 어떤 긴장감도 일으키지 않는 지경이다. 죽음과 갈등이 지배하는 사회.

 생명. 평화.

 그래서 더 절실한 것들이다. 생경하고도 꿈같은 이 두 단어가 우리 삶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도법 스님은 말한다. “지금, 여기, 나부터 시작하라”고.

 이 척박한 땅에서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삼고 지금까지 걸어온 도법 스님이 지난달 28일 광주를 찾았다. 지난해 11월부터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는 ‘광주시민인문학당’이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을 초청해 강연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강연 전 도법 스님을 만났다.

 

 “덜 심란한 게지”

 “별로 심란하지 않은 게지. 그래서 견디고 있는 거지. 정말 싫고 두려운 것을 만나면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가잖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황을 바꾸려 하잖아요. 심란하다 잘못됐다 말은 하지만 실은 지금 상황이 견딜만한 거지.”

 질문은 칼이 되어 질문자에게 돌아온다. 간단하고 명확하다. 날씨는 요동을 치고, 예상치 못한 재해들이 빈번해지는데다 나락으로 떨어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삶의 전반을 지배하고, 빈곤은 되물림되고, 죽음은 불평등하게 오며,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경쟁원리에 정신은 피곤한 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그대로 지속되는 이유는 그렇다. 움직이지 않고 견디고 있다.

 “구제역도 그래요. 소·돼지들의 죽음이 안타깝고 잘못됐으면 죽이지 않으면 돼. 구제역이 왜 생기나.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잖아요.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으니 집단축사를 하게 되고, 집단축사를 하게 되니 전염병에 취약해지는 거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살처분이 괴롭다면 자신의 실생활을 건강하게 만들어야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식단을 짠다든지 실천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 말로만 괴롭다 하는 것은 정직한 삶이 아니지. 최소한 성의를 보이면서 발언해야지.”

 지금 여기 나부터 하지 않으면 ‘살육의 시간’은 또 온다. 생매장 되는 돼지들의 비명에 눈물을 흘리는데 그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는 삶”

 위기임은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공익광고들이 아무리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그려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도법 스님은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더 많이 갖겠다, 더 편히 살겠다는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으로는 위기가 올 수 밖에 없어요. 더 비싼 자동차를 굴리고 싶어하고,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위기가 오지 않겠어요?”

 도법 스님은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라 한다. 개인적인 실천이 결국 사회적 변화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뜻이지 싶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씨실과 날실이 엮이듯 변화는 생겨난다. 진단은 많은데 실천이 없으면 공허하다.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도 명확하다.

 “예의를 지키면 돼요.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키며 사는거지. 단순한데 복잡하지. 난 그 가능성을 공동체에서 본거지. 사람으로써 예의를 지키면서 사는 동네,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본 거에요.”

 자연과 이웃과 서로 어울리고 의지하며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 도법 스님이 지리산 자락에서 일구고 있는 꿈이다.

 

 “주체척으로 살아라”

 도법 스님의 말들은 정확히 한 곳으로 흘렀다. 일종의 죽비소리였다. 돌아보고 반성하고 나아가라는 주문이었다.

 “전국에서 피워올랐던 촛불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조금 달랐어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대통령은 심부름꾼인데 세상에 심부름꾼을 원망하고 탓하는 주인이 어디 있나. 주인들이 왜 이렇게 무능력하고 한심하고 무책임한 건가. 그러니까 심부름꾼이 주인 무시하고 맘대로 하는 거지. 누구 때문에 못살겠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지.”

 죽비소리는 소위 진보와 보수에도 똑같이 향했다.

 “이놈의 자본주의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고, 타파해야 한다고 이야기 해요. 스스로 자본주의적 가치와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게 가능한가요? 만약에 싸워서 이겼다 그럼 그 다음은 뭔가요? 스스로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와 방식 안에서 살고 있으면 그 이후에도 결국 자본주의가 되는 거지.”

 도법 스님의 말에는 여백이 많았다. 질문은 질문으로 돌아왔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데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지금, 여기, 나부터 시작하라”는 도법 스님의 말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다. 어떤 말도 공허하다. 실천하라는 이야기다. 조계종단의 고위직도 모두 던져버리고 빈 몸으로 5년간 2만8000리를 걸으며 생명평화의 가르침을 보여준 도법 스님의 가르침이다.

 글=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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