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넘어 ‘지구시민’ 키우렵니다”       

 시대적 아픔에 등 돌리지 않았고, 시민단체의 책임을 고민했으며, 사회적 진보를 소신으로 행동해 왔으니…. ‘세계적으로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당연했고, ‘지구시민운동’을 사명으로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인류애적 사랑의 실천’이랄 수 있겠다. 그 결단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데, 신앙을 지렛대 삼아 이를 감당하고 있는 이가 남부원(52)이다.

 최근까지 그는 광주YMCA 사무총장의 자리에 있었다. 지난 3일 이임식이 이뤄졌고, 그는 한국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에 새로 취임했다. 이와 함께 그의 광주 생활도 끝을 맺었는데, 3년8개월만이다.

 

 시민단체 ‘맏형’ 광주YMCA 역할 고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과 아시아·태평양 곳곳에서 활동하던 그가 광주에 정착한 게 2007년 6월. 광주YMCA가 사무총장을 공모했는데, 당시 한국YMCA 전국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가 지원한 것이다.

 “이제껏 서울과 외국에서 주로 활동했지, YMCA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지역청년회 활동이 전무했거든요. 그때 광주YMCA는 ‘현장’으로 크게 다가왔죠.”

 하지만 광주의 의미는 그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는 기독교 영성운동의 선각자들이 즐비했던 고장이었구요. 정치·사회적으로는 민주화의 성지잖아요.”

 광주가 고향인 아내의 권유도 컸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인데, 이젠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난생 처음 정착해서 산 광주인데, 다시 떠나는 소회는 어떠할까?

 “지난해 창립 90주년을 맞은 광주YMCA의 기념사업을 잘 치렀고, 이제 100주년을 바라보며 ‘비전2020’을 수립하고 떠나는 게 보람입니다.”

 물론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YMCA 내부에만 너무 집중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광주 시민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연대하는 활동이 부족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광주YMCA가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의 ‘맏형’으로서 좀 더 내놓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한 것도 맘에 걸린다”고 했다.

 4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송구한 마음도 전했다. “한국YMCA 전국연맹으로의 이전이 하나님의 인도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광주YMCA에서의 새로운 배움과 경험은 한국YMCA 전체를 대면하면서, 시대적 부름에 응답하라는 엄숙한 명령으로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무를 받아 안겠습니다.”

 지난 3일 광주YMCA 무진관에서 행한 그의 공식 이임사다.

 이날 행사를 끝으로 그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정치적 격동기 청년 시절을 보냈고, 삶의 밑거름인 신앙을 신실하게 다졌던 토대로의 귀향이다.

 195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유학갔다. YMCA 활동의 모태가 된 기독교 신앙은 고교(서울 대성고)때 접하게 됐다.

 “모태신앙은 아니구요. 친구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당시 학교나 사회 모두 문화적으로 척박했거든요. 그런데 교회에 가니까 공연 등 각종 문화활동이 풍성하더라구요. 처음엔 신앙보다는, 교회가 제공하는 문화적 환경에 매료됐나고나 할까요.”

 

 유신 말기 시국 연루돼 갖은 고초

 고교 졸업 후 1978년, 그는 연세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정치외교학.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 유신 통치가 절정에 달했던 때다. 당시 캠퍼스엔 학생보다 사복 경찰이 더 많았다. 대학가 시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광기였는데, 정권이 대학생을 그만큼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당시 대학이 그랬다. 겉으론 숨죽였지만, 속에선 민주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던 것. “대학에서도 기독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당시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지만, 기독학생회도 사회 참여 운동이 활발했죠.”

 경찰에 점령된 학교에선 집회를 선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학내 곳곳에 경찰이 깔렸으니까 금방 진압당하죠. 5분만 지속하면 그 집회는 ‘성공’으로 평가받던 시절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내에 유인물이 뿌려졌다. “마지막 문장이 ‘역사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내용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봤는지, 경찰은 바로 기독학생회를 배후로 지목했어요. 저는 당시 그 단체 부회장이었는데, 다른 임원들과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인물을 누가 뿌렸는지는 지금도 몰라요. 우리 단체에서 한 건 아닌데….”

 4학년 땐 안기부에 끌려갔다. “프락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안기부에서 저에 대한 파일을 내미는데, 학교에서 했던 말과 행동이 빼곡히 적혀 있더라구요. 기록된 것 중에서 단 하나라도 해명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일주일간 갇혀 있으면서 무자비하게 얻어맞았죠.”

 모두 기독학생회를 배경으로 이뤄진 활동이고, 그에 따른 뒷감당이었다. 하여 당시는 누가 전공을 물으면 ‘기독학생과’라고 답했다고 했다.

 정의·사랑·평화, 이는 신앙적인 교리를 넘어 삶의 기준이 됐다. 이런 바탕에서 장래 걸어갈 길은 분명해졌다.

 기독학생회의 정신과 지향점이 같은 단체로 YMCA가 눈에 띄었고, ‘내가 일할 터전’이라는 판단이 섰다.

 

 서울Y 여성 참정권 운동 불 지펴

 하지만 그곳에서도 시련은 찾아왔다. 2002년 무렵이다. 그가 서울YMCA에서 근무할 때다. 서울Y는 1903년 설립된 ‘맏형’이지만, 역사성과 권위가 되레 문제로 등장했다. 설립 후 100여 년 간 여성에게는 총회 회원 자격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 당시 서울Y 간사인 남부원을 중심으로 젊은 그룹이 이에 문제를 제기했다. “서울YMCA는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서 남녀 회원에게 동등한 자격을 줘야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요구였다. 하지만 서울Y는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

 “시대착오적인 여성 참정권 제한을 없애자는 게 드러난 현상이라면, 본질은 YMCA가 거대화·관료화되면서 퇴색해진 본연의 운동정신 회복에 있었다고 봅니다.”

 이때 YMCA 개혁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남부원 간사는 훈장 대신 멍에를 짊어졌다.

 서울YMCA에서 ‘대기 발령’이라는 징계를 받은 것. 이후에도 서울Y는 여성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다가 한국YMCA 전국연맹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이 변했다. 지난 1월 대법원이 ‘여성에게 총회 회원이 될 자격을 주지 않은 건 성차별이기 때문에 위자료를 줘야 한다’고 확정 판결했고, 이에 따라 서울YMCA가 지난 2월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기에 이른 것. 당시 남부원 간사 등이 문제를 제기한 지 10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아쉽죠. 서울YMCA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법원에 등 떠밀려 ‘개혁 시늉’을 낸 셈이니까요.”

 이 일로 남 총장은 서울YMCA를 떠나 전국연맹에서 활동했다.

 그의 전국연맹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시아·태평양YMCA연맹에서의 활동이다.

 1998년 그는 홍콩에 본부를 둔 아시아·태평양YMCA연맹 프로그램 국장으로 취임, 2001년 12월까지 4년 동안 근무했다. 1987년 아·태연맹 간사학교에 참여한바 있는데, 당시 그를 눈여겨본 바트샤하(Dr. Bart Shaha·방글라데시아)가 아·태연맹 사무총장이 되면서 사명을 맡긴 것이다.

 “제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됐죠. 아·태연명 산하에 24개 나라가 있는데요. 네팔·방글라데시·서사모아·피지·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태국 등 19개국을 방문해 구석구석 체험했으니까요. 아시아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된 시절입니다.”

 지구시민교육센터 설립 구상

 그때까지 잘 보이지 않았고,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들이 ‘이웃’으로 다가왔다. 국가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떠올렸고, 이게 ‘지구시민운동’의 발판이 됐다.

 환경·여성·빈곤·인권·민주주의 위기 등 이들이 당면한 현실을 고민하고, 이를 극복할 세계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지구시민운동을 주창했지만,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걸 느낀 겁니다.” 2006년, 그는 영국 버밍험대학으로 유학 가 ‘지구윤리학’을 전공했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관점에서 윤리학적 담론을 세우는 학문인데, 남 총장은 이 과정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구시민운동’의 이론까지 겸비한 셈. 이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남 총장은 ‘지구시민교육센터’ 설립을 구상중이다. 이는 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에 새로 취임한 그가 중점적으로 추진할 과제이기도 하다.

 글=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