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처럼 굳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

 미8군 밴드를 관장하는 회사는 6~7개 정도였던 것 기억된다. 그 중 우리가 속한 회사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씨가 악기창고에서 연습했다는 주식회사 `화양’이다. 이런 회사들은 8군과 공연 전속계약을 맺고, 밴드들의 임금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소개소 역할을 대행하는 회사들이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임금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이 벌어들인 돈의 삼분의 일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밴드를 많이 보유하는 회사는 수입이 그 만큼 많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 회사의 이른바 매니저들이 또 임금을 떼어 먹는다. 어찌됐든 우리들로서는 이에 항의하거나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저 작은 월급이나마 받아서 밥을 먹고 연습할 수 있는 무대가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야, 싸배지 군산 비행장이다. 빨리 짐 꾸려라.” 영국제 버버리코트가 썩 어울리는 오필영 단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우리들은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부랴부랴 농짝 같은 무거운 스피커와 나머지 악기들을 트럭에 실었다. 소 한마리를 주고 산 영국제 오르간도 소중히 포장해 트럭에 실었다.

 장항에서 배를 탔다. 소설가 채만식과 시인 고은의 고향이고, 일제가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실어 날랐던 군산항.

 이 수탈의 땅. 이제는 미군들이 점령해버린 군사 비행장 옥구에도 봄이 왔다. 노란 잔디가 제법 푸른빛을 머금은 넓은 초원. 의자에 앉아서 쥬크 박스에 흘러나오는 톰 존스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을 듣는다.

 “형 식사하러 가게요.” 막내 복길이가 손을 잡아끈다. “응. 그래.” 식당에는 미군들 시중을 드는 종사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접시를 들고 차례를 기다렸다. 한 동안 먹어보지 못한 윤기 흐르는 하얀 쌀밥에다 파란 시금치나물, 잘 구워진 불고기와 생선들을 큰 접시가 넘쳐나도록 담았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국수에 라면 두어 개로 연명했던 터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환장할 음식을 정신없이 먹었다. 이를 바라보던 배식하던 아줌마는 “이번에 온 밴드들은 며칠씩 밥을 굶었남~. 그래 많이 먹어. 한창 나이에 배 곯으면 안 되야~.” 몇 번을 가져다 먹어도 되고, 누구 눈치 보지 않아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클럽 안에는 흑·백의 군인들이 뒤석여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들은 직업군인이라서 일과가 끝나면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군대에서 맥주를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그런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부러운 존재들이었다. 조심조심 무대 뒤로 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떨린다. 한국인 앞에서도 떨릴 판인데 어설픈 실력으로 수준 높은 음악을 듣는 미군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도 떨렸다. 리더 정섭이도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자! 침착하게 그 동안 연습했던 것처럼만 하자.” 우리들은 손을 맞잡았다. 상훈이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얼굴이 창백하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젠장. 부딪혀 보는 거야.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냐. 지들은 사람 아닌가?’ 커튼을 열고 무대에 올랐다. 그~긍. 정섭이의 기타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클럽 안을 가른다. 이윽고 복길이가 딱 딱 딱딱 네 번 스틱을 친다. 쟝 쟝~오프닝 곡은 산타나의 `불랙 매직 우먼’이다. `갓 어 블랙 매직우먼’ 베이스 병훈이가 그래도 가사 틀리지 않고 묵직한 톤으로 노래를 불렀다. 연주가 끝나자 미군들은 `테이크 플레이’를 연발했다. 순간 리더 정섭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들에 영웅이었던 정섭이의 이마에 땀이 흐른다. 다음 곡은 우리들이 가장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는 산타나의 `쌈바 파티’다. 드디어 정섭이의 기타 실력이 빛을 발했다. 흐느끼는 듯한 정섭이의 기타는 피울음을 토해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터졌다. 나도 상훈이도 손가락에 까지 땀이 배었다. 아무튼 우리들의 첫 무대는 이렇게 끝났다. 상훈이는 나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민판기<(사)금계고전 연구원장>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