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뚜벅뚜벅 ‘포크음악’을 걷다

 평생 통기타와 함께 살았다. 음악과 함께 걸어갔던 그 길, 많이 외로웠다. 폭염의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의 꿈은 광주 안에 포크음악을 완전하게 내려놓는 것이었다. 가수 이장순, 사람들은 그를 광주의 1세대 통기타 가수로 부른다. ‘대부’와 같은 어감인데, 고단한 길을 걸어온 낙타에 대한 빛나는 헌사다. 그가 힘들게 걸어온 모래의 길은 늘 뒤에 선 사람들의 좌표가 됐다.

 60년대 포크 음악의 혁명이 일어난 곳은 분명 광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날로그적 감성이 완전하게 저문 이 디지털 세상에 여전히 포크 음악이 굳건한 곳은 광주밖에 없다. ‘사직골’에서는 매일 통기타 소리가 흘러나오고, 노래가 어둠 사이를 걷는다. 이장순의 뒤에 섰던 포크가수들은 음악으로 세상에 빛을 보탠다. 정용주가 그렇고, 박문옥도 그러하며, 김원중 역시 다르지 않다.

 조금 설렌다. 오는 9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광주 포크음악의 역사를 만나는 기획공연이 열린다. ▶관련기사 14면

 그는 첫 무대에 선다. 그리고 그가 저문 뒤 새로운 빛을 열어야 할 후배가수들이 뒤를 받친다. 그 공연의 이름은 ‘산도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인데, 상징적이다. 김용택의 시 ‘저 산 저 물’에서 가져왔다.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 물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물이다/ 내가 누우면 산도 따라 나처럼 눕고/ 내가 걸어가면 물도 나처럼 흐른다/ 내가 잠이 들면 산도 자고/ 내가 깨어나면 물도 깨어난다>

 선문답 같은 이 시적 진술을 광주의 포크음악으로 바꾸면 의미가 완전하게 서로 상통한다. 맨 앞에 선 이장순은 포크음악 위에 선 지 40년이 넘었고, 뒤따르던 후배들은 이제 30년에 접어들었다. 해찰하지 않고 뚜벅뚜벅 가슴으로 걸어왔고, 비로소 포크음악이 무엇인지 알았다. 가수 이장순, 그가 잠들면 광주의 포크음악도 함께 자고, 깨어나면 같이 잠을 털고 일어난다.

 

 신중현에게서 얻은 음악적 영감

 음악이 좋았다. 특히 전자기타에 매료됐다. 1964년, 그의 나이 열아홉에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태평극장에서 기타의 신, 신중현이 공연을 했다. 모두 4회로 진행된 공연, 그는 4회 전부를 표를 끊어서 봤다. 아무리 봐도 물리지 않았다. 강력한 기타 사운드가 내면을 적셨다. 그는 신중현을 보며 기타에 일생을 걸기로 했다.

 2년 후 그는 서울에서 4인조 그룹사운드를 만들었다. 이장순은 보컬과 기타를 맡았다. 잠도 안자고 끊임없이 연습했다. 문 닫은 공장을 빌려 연습실을 만들었는데, 구경꾼이 차츰 늘어나 인근에서 깨나 유명해졌다. 미군 캠프에서 공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청춘들의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은 늘 초라했다. 그러다 우연히 통기타 사운드를 들었다. 한 마디로 음악이 가슴에 꽂혔다.

“잘 기억도 안 나는데, 라디오에서 들었을 거야. 통기타 소리가 가슴을 후벼.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었지. 이거다 싶더라고. 통기타 하나면 어떤 장르의 음악도 소화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

 틀리지 않았다. 그 확신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통기타를 또 다른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밥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통기타가 옆에 있었다. 그에게 통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숨을 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1972년 7월, 그는 통기타 하나를 들고 광주에 내려왔다. 12줄 기타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충장로에 퍼졌다. 포크음악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물건 하나가 광주에 떴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DJ, 충장로를 평정하다

 이장순이 공연에 나섰던 첫 무대는 호프집이었다. 그를 보기 위해 대학생들이 밀려들었다. 라디오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스템이 도입됐다. DJ들의 입담과 음악적 취향에 매출이 좌지우지하던 다방이나 호프집, 막걸리집들을 돌며 공개방송을 했다. 그는 거기 출연해 통기타 라이브 공연을 했다. 금세 유명인사가 됐다. 그가 뜨는 곳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새로운 음악과 공연에 대한 욕구가 충장로를 휩쓸었다.

 그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연도 만들어냈다. 장소는 ‘프린스 제과점’이었다. 포크음악과 개그가 혼합된 형태였는데, 통기타의 지평을 넓혔다. 당시 충장로는 DJ들의 세상이었다. 인기 있는 DJ들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고, DJ 입담에 따라 매출 전표의 두께가 달라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출입이 안 됐다. DJ들의 활동무대는 술집이나 다방이었다. 장소를 제과점으로 옮기면서 중고생들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70년대 충장로는 통기타로 피고 지는 선율의 나라였다.

 그는 늘 혼자 서 있지 않았다. 함께 그 길을 걸어갈 후배들을 찾았다. 지역방송에서 연출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이용해 ‘별밤 가족’을 모았다. 직접 오디션을 보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후배들을 방송으로 인도했다. 지금 어느 행사에서나 통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 정용주도 ‘별밤 가족’ 출신이다. 그렇게 충장로의 음악적 토양은 단단해졌다.

 그는 늘 후배들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다. “배고프지 마라”고. 말의 의미가 복잡하다. 당시 충장로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은 결국 밤무대를 통해 먹고 살았다. 레퍼토리를 늘리는 게 몸값과 직결됐다. 통기타를 향한 끊임없는 열정 뒤에 인정이 뒤따르고 비로소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있었다.

 “통기타 하나면 모든 음악을 다 할 수 있어. 근데 손님들이 뽕짝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애들이 있어. 자기 음악적 취향이 아니라는 거지. 불러서 혼을 내놓지. 음악을 가리면 안 돼. 모든 음악을 통기타에 맞게 재해석해 내야지. 밥 굶고 음악 하다가 지쳐 쓰러지면 광주는 아까운 인재 하나를 놓치는 거야. 난 사실 그게 안타까웠던 거야.”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

 그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다. 이장순은 80년대 후반 홀연히 광주에서 사라진다. 얼마 되지 않아 중앙 방송의 중심에 섰다. 그는 방송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라디오 연예 다큐 ‘대중예술사’의 대본을 썼고, ‘가요무대’와 ‘열린 음악회’를 기획했던 것도 이장순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건 대충한 적이 없고, 개인보다 저변을 생각했다. ‘가요무대’만 해도 그렇다. 한때 이 나라 대중음악사를 호령했던 사람들이 가난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 생계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서울생활을 접고, 그가 다시 고향 광주로 돌아온 게 2002년이다. 지금 그의 거처는 사직골, 통기타 하나로 피고 지는 영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에겐 오랜 숙제가 하나 있다. ‘한국 가요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20년 넘게 모아놓은 방대한 자료들, 이제 엮을 일만 남았다. 얼마 전부터 ‘전라도닷컴’에 연재도 시작했다. ‘이장순의 이야기로 쓰는 한국가요사’이다. 지금 그에겐 많은 것들이 절박하다.

 지난해 9월 그는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대장에서 시작한 암이 여러 장기에 이미 전이된 상태였다. 80kg이던 몸무게가 순식간에 61kg으로 줄었다. 기로의 순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필요했고, 살아서 할 일이 있었다. 대장암 4기 환자의 생존율은 불과 5%, 그는 일어섰고 할 일을 한다. 몸무게도 많이 회복했고, 그의 몸은 지금 건재하다. 여전히 통기타 하나에 의지해 공연에 나서고, 오랜 숙제를 끝마치기 위해 글을 쓴다.

 그에게 더 무엇이 남았을까? 그는 말했다.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해. 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제 발로 꾸준히 30년쯤은 걸어야 내면을 볼 수 있지. 음악도 그래, 이제 좀 포크음악이 뭔지 알 거 같아. 우직한 정용주도 있고, 고집 센 박문옥도 있고, 기특한 김원중도 곁에 있어. 그 친구들과 함께 광주에서 포크음악의 산을 한 번 만들고 싶어. 그 산 한 번 오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어.”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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