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열망”

지금 같은 시대에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지구력’이다. 잡아먹히지 않아야 하며, 지치지도 말아야하며, 자책하거나 괴로운 마음에 압도당하지도 않는 지구력 말이다. 이 모든 과정들을 통과하며 그가 서 있다. 컬쳐 클럽 네버마인드 남유진 대표. 그야 말로 ‘never mind’하게 살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게 별로 없다”는 그의 말은 그냥 무시한다.


10년의 세월 동안 ‘네버마인드’를 이끌어 왔다. 수많은 지역 인디 밴드들이 네버마인드를 둥지 삼아 실력을 키웠다. 그로선 감회가 남다른 일이었겠다. 얼마전에는 지역 인디 역사 10년의 결과물이기도 한 지역 인디밴드들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금남로에 지역 인디밴드들을 세우리라 마음 먹었던 바 대로 광주인디뮤직 페스티벌이라는 작은 축제를 8년 째 해내고 있다.


고군분투의 시간들

 2002년이었다. 붉은 악마들이 광장을 점령했던 때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때 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자생적 문화 공간들을 자본이 스멀스멀 먹어치우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심장한 시기에 사비를 털어 전남대 후문에 컬처 클럽`네버 마인드’라는 공간을 마련했다.

 `문화’를 통해 세상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클럽이 아닌 컬처 클럽인 이유가 있었다.

 “그냥 라이브 클럽이 아니라 대안문화공간을 꿈꿨어요. 공연도 하고 독립영화도 보고 여러 문화활동들이 이뤄지는 공간이요.”

 지역 인디밴드들을 중심에 세운 것도 그 같은 이유다. 인디 밴드. `자본’으로부터 인디펜던트(독립)다. 왜곡된 음반산업 시스템의 틈바구니에서 동네 음악이 살아나는 게 중요했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들과 태도들을 네버마인드라는 공간 속에서 나누고 싶었어요. 그런 기회들을 네버마인드가 주고 싶었습니다. 이곳에 드나드는 젊은 지역 인디 밴드들이 실력을 키우고 세상을 알아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작은 공간을 중심으로 좋은 기운들이 생겨나는 것. 10년 전 네버마인드를 꾸리면서 그가 꿈꿨던 것들이다.

 그렇지만 역시 현실의 벽은 높았다.

 술집과 유흥시설이 밀집한 대학가의 월세는 높았다. 밀린 월세를 위해 때론 공사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늘 힘들었다. 지친 동지들은 먼저 떠나가기도 했다. 지역에서 음악을 하고 싶었던 친구들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며 서울로 떠나기도 했다.

 그 10년 동안 대학 문화는 더 침체됐다. 대학 노래패들이나 밴드들은 사라져 갔다.

 

 작은 것들이 자생하는 토양 마련돼야 문화가 일상

 그렇다면 그 힘든 상황 속에서 그를 일으켜 세운 힘은 무얼까?

 “이젠 왠만큼 힘든 일에는 내성이 생겨서 별로 힘들다고 생각지도 않는다”는 쿨한 대답.

 “힘들기만 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죠. 그 10년 동안 그래도 꾸준히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친구들의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흐뭇한 일이구요. 네버마인드 라는 공간에서 함께 음악을 통해 교감하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변하는 속도가 아주 더디기는 하지만 변화는 있어요.”

 여전히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디밴드들, 인디음악의 축제로 매년 펼쳐지는 광주인디뮤직 페스티벌, 10년을 정리하는 컴필레이션 음반 같은 것들이 보여지는 변화의 증거들이다. 보여지지 않는 것들은 더 많을 것이다.

 “내가 네버마인드라는 공간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자생’이에요. 나 혼자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도 네버마인드라는 공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자생력 말이에요. 네버마인드 같은 작은 것들이 살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야 문화가 일상이 되지 않을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영세 문화’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구력의 근원은 `항상 뭔가 꿈꾸는 사람’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면 10년의 지구력이 근원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돌이켜 보면 그는 무언가 항상 꿈꾸는 사람이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91년 대학을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는 수많은 선생님들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며 세상을 봤고, 대학 때는 데모하다 수감되기도 했다. 그 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옳다고 생각했으니 행동도 그랬어야 했다. 그러다 학생운동의 어떤 경직성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느꼈고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로 떠났다. 노동운동이 대안으로 보였고 공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 땐 전태일 처럼 살고 싶다”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는 바 대로 잘 안됐다.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했던 성격이 컸다.

 “아주 똑똑하지도 않았고 내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안된다 생각”해 할 수 있는 걸 고민했다. 그러던 중 독립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념적으로 거창한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걸 해보자. 사소하더라도 실천을 통해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 길을 어렴풋하게 독립문화에서 보았다.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고민하고 선택하는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결국 그를 크게 움직여 여기까지 이르게 한 동력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두 가지다.

 

 다시 “네버 마인드”

 여전히 현실은 정글이다.

 `문화중심도시’가 장밋빛 미래를 광고하지만 여전히 `작은’ 것들은 살기 힘들다. 더 크고 그럴 듯 한 것들에 관심이 쏠린다. `브랜드 공연’ 육성이니 아트광주니 에딘버러 페스티벌이니 새로운 축제들이 론칭된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복잡하다.

 “문화도시 한다고 온통 큰 것만 신경쓰는 분위기”가 거슬린다. 작은 것들은 여전히 홀로 싸우다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never mind”다. 갈 길은 간다.

 “네버 마인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그다. 그가 걸어왔던 삶의 증거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꿈은 소박(?)하다. 다른 욕심은 없다.

 네버마인드라는 공간이 또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 자리매김 하는 것. 젊은 인디 뮤지션들에게 지역에서도 음악을 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

 지금까지 보여준 지구력이면 가능할 것도 같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예컨대 친구의 동생의 친구가 베이스 기타를 치는 `팡방밴드난반댈세’의 정기 공연을 보러 갔다 5년 만에 대학 친구를 만난다거나, `상식이 밴드’가 부르는 노래가사에 울컥해 투표장에 나간다거나 하는 그런 즐거운 상상도 가능하겠다.  글=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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