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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이만난사람] 헌혈 600회 기네스인 손홍식 씨
“헌혈 가능한 건강 자체가 축복”
채정희 goodi@gjdream.com
기사 게재일 : 2011-05-11

 손홍식(61) 씨. 우리나라에서 헌혈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다.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됐으니 자타 공인이다. 그렇다고 헌혈을 멈춘 건 아니어서 지금도 그는 2주마다 횟수를 늘려가고 있다. 하여 그의 헌혈 기록은 끝을 예측할 수 없는데, 지난 달로 600회째를 기록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헌혈왕’인 그가 최근 거리에서 서명을 받느라 분주했다. ‘헌혈의 집을 지키자’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한 것. 국립 전남대학교가 후문 쪽에 들어서 있는 헌혈의 집 부지를 비워달라고 요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본보 3·4·9일자 보도

 “나가지 않으면 법적 조처를 하겠다”는 시한이 지난 6일이었는데, 적십자 광주·전남혈액원은 대학 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시민을 상대로 한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혈액원에 따르면 광주·전남지역에서 운영 중인 8개 헌혈의 집 중 전남대의 헌혈량은 20%를 넘는 요충지다.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폐쇄라니….” 혈액원의 절박함은 손 씨 본인의 것이기도 했다.

 

 “전남대 헌혈의 집 반드시 지키자”

 “전남대 후문에 헌혈의 집이 개원한 게 1997년인데, 제가 제안해서 생긴거거든요.” 당시 김태홍 북구청장을 상대로 손 씨가 헌혈의 집 개원을 요청한 게 씨앗이 됐고, 혈액원과 전남대가 의기투합해 결실을 보았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인연으로 탄생해 15년째 운영돼온 헌혈의 집이 문을 닫아야 할 처지라니…. 전남대의 퇴거 요청을 전해 들은 손 씨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작정 전남대 총장실로 찾아갔죠.” 면담을 요청했다. “헌혈의 집을 제안한 당사자이고, 북구민이고, 다헌혈자로서 헌혈의 집 운영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비서실의 답변은 “그 문제라면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몇 번 더 면담을 요청했지만, “‘그게 헌혈의 집 운영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핀잔만 들었노라”고 했다.

 전남대 측은 헌혈의 집 부지를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단 연구·학습용으로 이용하겠다’는 게 공식 입장인데, 일부에선 ‘법인화에 대비 수익용 공간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전망을 하고 있다.

 “학교 측이 어떻게 재활용하든,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현재의 의미보다 더 값진 게 있을까요?” 하여 혈액원은 “전남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데 입장을 정리했고, “시민께서 지켜주시라”며 호소하기로 했다. 서명 운동도 그 중 하나인데, 여기에 손 씨가 빠질 수는 없는 일. 명실공히 대한민국 헌혈왕에, 헌혈 홍보대사이기 때문이다.

 

 헌혈 ‘18년 지각생’

 손 씨가 최초로 헌혈을 한 건 1984년이다.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날짜는 5월29일. 장소는 동구 대인동 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이었다. 당시 그는 34살이었다. “헌혈은 만 16살부터 할 수 있거든요. 따지고 보면 헌혈 지각생이죠. 그것도 18년이나….”

 어릴 적부터 주삿바늘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때문에 헌혈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를 극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면 5~10분이면 가능한 데, 그동안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이 많이 부끄러웠어요. 나를 이기지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자괴감도 컸구요.”

 헌혈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어려웠지, 이후론 훨씬 쉬웠다. 전혈은 2개월에 한 번씩 가능한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작심 또 작심했다.

 그렇게 10회가 넘어가니, 헌혈은 습관이 되고 원칙이 됐다.

 그에게 헌혈이란 목욕하는 것, 또는 이발하는 것, 방 안 공기 바꿔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이잖아요.”

 헌혈로 시작된 생명 나눔은 장기기증으로 이어졌다.

 “혈액투석실에서 환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들에겐 장기 기증 외에 다른 희망이 없거든요.” 그는 1994년 7월, 콩팥 기증을 실천했다. 이때라면 헌혈 10년째, 횟수로는 60회 이상을 실천한 다음이다.

 또 이 무렵은 우리나라에서 장기 기증이 막 태동하던 시기로, 손씨의 콩팥 기증은 광주·전남 지역 내에서 이뤄진 최초의 장기 기증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하지만 손 씨의 콩팥을 받은 이는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일 뿐. 더 많은 이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그는 홍보에도 온 힘을 쏟았다. ‘기증자의 용기가 환자에겐 생명이 되는’ 실천을 독려함이다.

 

 사후 시신·각막도 기증 서약

 성분 헌혈이 가능해지면서 손 씨의 혈액원 출입은 더 빈번해졌다. 헌혈은 전혈과 성분헌혈로 나뉘는데, 전자는 혈액을 수혈받아 이를 혈장·혈소판 등 성분별로 분석해 제공하는 방식이다. 전혈은 2개월 만에 한 번씩 가능하다. 1년이면 6차례에 불과한 것. 반면 성분 헌혈은 혈소판이나 혈장 등 필요한 부분만 채혈한다.

 성분 헌혈이 가능하진 게 1990년대 중반인데, 손 씨는 이때부터 ‘미치도록’ 헌혈을 하고 다녔다.

 우리나라 최다 헌혈자로 기네스북에 오르고, 지난달 헌혈 600회 실천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이 같은 활동의 결과물이다.

 단순히 헌혈하는 데 의미를 두지 않고, 수혈자에게 최상의 피를 제공하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혈액은 채혈 6시간 이내에 수혈받는 게 가장 좋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어떨 때는 직접 병원을 찾아가 채혈을 하죠. 혈액원을 거치면 채혈-수송 과정을 거치게 돼 시간이 지체되잖아요.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채혈하면 이 같은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2002년 12월, 손씨는 간의 절반도 기증했다. “서울 아산병원에 간 기증 의사를 밝혔고, 건강 검진을 거쳐 곧바로 이식이 이뤄졌죠.”

 혈액은 기본이고, 장기로는 콩팥에 이어 간까지 내놓고도 그의 생명 나눔은 그치지 않았다. 죽어서도 그의 몸은 다른 이를 살리는 데 쓰이게 된다. 사후 시신·각막 등의 기증에 이미 서명을 마친 상태다.

 “콩팥이나 간을 이식받은 분들이 아직 살아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할 순 없죠. 그들이 기증자인 저에게 큰 부담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요.” 그들이 건강한 것 하나만으로 그는 충분한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전거, 내 건강의 원천

 그는 이 모든 것이 건강이 가져다준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자전거 덕이 크다.

 2006년 5월 이후, 그는 어디를 가든 자전거를 탄다. 공무원(통계청)을 퇴직한 뒤다. “하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거든요. 주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요금만 계산해도 한 달 20만~30만원 선이 되더라구요.”

 어느 날 집에 모셔져 있던 아들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펑크가 난 자전거를 5000원을 들여 수리했다. ‘본전(5000원)이라도 건지자’하고 올라탄 자전거는 그 이후로 일상이 됐다.

 “보성에 있는 시골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거예요. 오후 5시에 출발했는데 밤 10시에 도착하더군요. 엉덩이가 얼얼하고 다리는 힘이 풀렸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고 버텼죠.”

 손 씨의 고향 보성에는 집과 논밭이 남아 있고, 그는 농사를 짓기 위해 수시로 그곳을 오가고 있다.

 보성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길은 더 여유를 부렸다. 오후 2시에 출발해서 화순역, 쌍봉사 유람하고 돌아와도 고향 갈 때와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

 그날 이후로 자전거는 손 씨의 일부가 됐다. 지금도 보성에 내려갈 때면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역에 내려서 타고 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이 같은 생활이 그의 건강을 지키는 동력이 되고, 이렇게 지킨 건강이 헌혈·장기기증이 가능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헌혈과 장기기증은 제가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제가 도움을 받고 있는 실천”이라고….

 “헌혈할 때마다 혈압·간 수치 등 제 건강을 체크해 주거든요. 이게 주기적으로 이뤄지니 헌혈은 제 주치의인 셈이죠.”

 글=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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