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밥’ 없이 ‘총’들 수 있었겠나?”

 지금껏 80년 5월을 다뤘던 영상은 많았다. 당연히 등장인물도 넘쳤다. 김태일 감독이 여기에 영상을 하나 더 추가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애’다. “역사를 움직였지만 역사엔 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조명하고자 했다”는 게 김 감독의 작업 취지다. 하여 다른 작품에선 ‘엑스트라’쯤에 머물렀던 이들이 ‘오월애’의 주인공들이다.

 이 영화가 최근 5·18광주민중항쟁 31주년과 맞물려 개봉·상영 중이다. 80년 그날을 겪고, 기억하고 있는 ‘무명씨’들의 증언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등장인물 속엔 총을 든 이도 있고, 밥을 푼 이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총을 든 사람만 조명했죠. 하지만 밥이 없었다면 싸울 수 있었을까요?”

 김 감독은 “80년 5월 당시, 밥과 총은 같은 의미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여 오월애는 지금껏 역사(기록)가 덜 주목했던 ‘밥’, 즉 여성들에게 더 다가섰다.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 씨잘데 없어. 이런다고 밥이 나오요? 옷이 나오요?” ‘그날’ 밥을 날랐던 아주머니는 한사코 카메라를 거부했다. 대부분의 태도가 이와 같았다. “오월은 아픔밖에 없어.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상구네’ 2년 동안 대인시장에 둥지

 마음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김 감독은 거처를 서울에서 광주로 옮겼다. 2009년 3월, 그는 대인시장에 입주했다. 대인 예술시장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

 ‘오월애’는 김 감독이 이로부터 2년 동안 광주와 함께 호흡하며 담아낸 영상이다. 아내 주로미 씨가 조연출로 작업을 함께 했다.

 김 감독이 대인시장에 자리 잡은 1년 뒤인 지난해 5월, 아들 상구(15살)도 작품에 합류했다. “상구가 초등학교 졸업 뒤 중학교 진학을 안 했어요. 그래서 서울에 홀로 두기는 뭐하고 해서, ‘아빠 도와서 아르바이트라도 해라’하고 데려왔죠.”

 그 길로 상구는 ‘촬영 보조’가 됐다. “수많은 이들의 증언을 곁에서 다 들었으니, 상구 역시 5·18의 산증인이 된 셈”이다.

 이렇게 가족이 팀을 이룬 ‘상구네’의 카메라 앞에서 5·18을 증언한 ‘무명씨’는 40여 명이다.

 “기존에 언론이나 자료에 등장하지 않았던 분들에 더 주목했죠.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증언을 끌어내기도 만만치 않더군요. 특히 여성분들은 더 입을 열지 않으시더라구요.”

 몇 번을 만나고, 인간적인 친분이 쌓이면서 ‘천금’같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도움도 컸다.

 특히 항쟁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김성용 신부가 많은 역할을 했다. 항쟁지도부가 있던 도청에서 취사조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소개해준 것. 이들이 증언하고 이 게 ‘오월애’에 담기면서 작품이 훨씬 풍요로워졌다.

 “‘오월애’의 주인공은 바로 이와 같은 이들이고, 증언”이라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하여 “감독이 아닌 출연자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당부가 당연하다.

 감독의 의도 대로 ‘오월애’엔 80년 5월 당시 활동했던 여성들이 집중 조명돼 있다.

 

 도청 취사조엔 여고생도 있었다

 취사조로 활동했던 이들이 대표적이다. 김순이 씨가 취사조가 된 사연은 이랬다. “김성용 신부가 밥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가서 보니 우리가 취사조가 된 거예요.”

 윤청자 씨도 당시 취사조. “신부님이 상무대 갔다 오셨는데. 아주 절망적으로 얘기해요. 우리 모두 많이 울었죠. 그날은 하늘에서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말할 수 없는 공허감에, 분노가 솟구치더군요. ‘광주시민 다 죽게 생겼구나’하는….”

 김순이 씨의 증언이 이어진다. “(취사조에는)여고생도 있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우리보다 걔들이 더 용감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김 감독은 바로 그 여고생 취사조인 김영희(가명) 씨의 증언도 담아냈다. 그는 “시위대에 밥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취사조로 들어갔다”고 했다.

 “다들 유서를 썼어요. 누군가 ‘죽을 때를 대비해서 부모님께 남길 말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같이 죽겠다는 마음이었죠. 오빠가 그 걸(유서) 가져갔어요.”

 밥을 퍼 나른 여성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도청 앞에 가보니까 얼척이 없습디다. 적십자병원에서도 ‘나 살리라’고 난리고…. 오매오매 그런 난리가 없어. 피부족하다고 아우성이고, 배 고프다고 난리고…. 그래서 쌀 얻으러 다녔제. 그 걸로 밥 해다 날랐고. 다친 사람들 본께, 그런 생각이 묵어지등마. 이놈이라도 먹고 일어나시오 하는….” 어렵게 입을 연 시장 상인 한 분의 증언이다.

 “시장에다 솥단지 걸어놓고 밥해서 금남로를 나갔당께. 어디서 밥을 해왔다고 (글씨를) 쓴 솥단지가 겁나게 많아. 우리는 그것도 없이 갔제. 밥을 푼께, 학생조차 시위대조차 몰려오는디. 주먹밥을 두 번도 못싸. 하도 ‘나 주씨오, 나 주씨오’한께, 한 번씩 무쳐서 내놓을 수밖에 없어.”

 그래도 여성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총 들고 싸우는 사람도 있는디, 밥은 아무것도 아니제.” 김 감독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당시 총을 들었던 이들도 ‘밥’을 잊지 못했다.

 “그때 주먹밥 쌌던 엄니들 한 번 대접해야”

 “항쟁 당시에 엄청나게 큰 솥단지로 밥해서 시민들에게 줬던 사람들, 그 주먹밥 만들었던 아주머니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소.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나경택 씨의 증언이다.

 “광주 시민들이 주먹밥 싸서 차에다 얹어주면 그게 꿀맛이었제. 그것이 우리 아픔을 대변해 줬고, 용기가 됐고.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 시민군 임병석 씨다. 김오진 씨도 다르지 않다. “그때 주먹밥 쌌던 시민들 다 모시고 싶어요. 오월 단체가 그것 해야 돼요.”

 김 감독은 ‘오월애’에 항쟁 당시 남성의 눈으로 본 여성의 모습도 기록했다.

 “전남방직 아가씨들이 까만 옷 입고 버스를 타고 구호를 외치며 가더라고. 그 장면이 잊히질 않아. 어린 여자들도 저렇게 하는 데. 진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시민군 양인화 씨의 증언이다.

 시민군 김오진 씨가 기억하는 장면도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지만 죽더라도 이름이라도 알고 죽자고 했지. (그중에는) 여자들도 3명이나 있었어. 전방 다니는 아가씨들인데.” ‘오월애’는 총을 들었던 이들도 담았다. 특히 항쟁 마지막 날 도청에서의 상황은 눈물 그 자체다.

 “오늘 저녁이 위험하니까. 젊은 사람은 다 나가라고 하더라구요. 다른 이들을 놔두고 어떻게 그냥 나갈 수 있었겠어요? 우린 죽음을 예감했어요. 이름과 주소를 쪽지에 써서 주머니에 넣었죠.” 한 시민군이 기억하는 항쟁 마지막 날 도청의 모습이다.

 “새벽 1시30분쯤 되니, 무장 지시가 내려와요. 여학생은 대피시키고, 남학생은 도청 가서 무기를 수령해서 다시 YMCA로 오라는 거야.… 후회 같은 건 안드는데. 솔직히 무섭습디다.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옷을 깨끗이 입고 죽어야 천당에 간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모 집에 가서 옷 갈아 입고, 주민등록증을 넣고. ‘이모! 아버지한테 연락하세요. 아마 내가 죽을 거예요’ 말하고 왔지.”

 

 그날 이후 기억의 감옥에서 고통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살아남은 자에겐 그 몫의 고통이 또 있었다. 김 감독이 이를 `오월애’에 기록했다.

 “시민을 위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어. 하지만 오랜 시간 폭도로 살아야 했던 고통은 끔찍했어.” 도청을 사수했던 기동타격대 양동남 씨의 증언이다.

 김춘국 씨도 같은 심정이다. “내 인생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여. 참여를 안 했어야 해. 이 걸로 내 주위나 가족이 엄청난 고난에 처했어. 수많은 광주 사람이 다 희생자야.”

 그렇다고 보람도 없겠는가. “이 세상에 뭣이 민주주의고, 무엇이 독재라는 것을 5·18항쟁을 겪고, 감옥을 갔다 오면서 알게 됐다니까요. 인생이 완전히 뒤바꼈어. 그렇지 않았으면 열심히 중국집 해서 지금쯤 부자가 됐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았죠.” 양인화 씨가 `오월애’에 남긴 메시지다.

 김 감독은 “그들은 3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을 하나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람들은 인제 그만 잊으라고 하지만 나의 기억은 언제나 제자리고, 그 기억의 감옥으로부터 나는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하소연을 끊임없이 들었다”는 것. 증언 후 2주 동안 몸져누울 정도로 심한 열병을 앓았던 여성도 있었다.

 김 감독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내상이 치유되지 않고, 이로 말미암아 생활조차 온전하지 못한 가정이 많았다”면서 “5·18 당시 여성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작업과 함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치유센터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글=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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