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종 섞인 초식동물사 흑염소 새끼 태연자약
사파리내 호랑이·표범 등 섞여도 예상외로 `평화’

▲ 낙타와 염소. 동물원에선 이종 동물간에도 공생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약육강식이 절대적 진리는 아닌 셈이다.

 흔히 동물계를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한다. 약자는 먹히고 강자는 먹는다는 지극히 잔인한 용어다. 차라리 ‘약자는 사라지고 강자는 남는다’는 식의 좀 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동물계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식물들도 ‘천이’라는 과정을 거쳐 우점종만이 숲의 지배자가 되며, 소나무숲 같은 경우는 뿌리에서 나오는 독한 물질로 인해 그 흔한 잡풀조차 자람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숲에서 좋다고 호흡하는 ‘피톤치트’ 같은 물질도 알고 보면 식물들의 전쟁 무기인 셈이다.

 세균이나 곰팡이 같은 미생물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예외 없다. 유산균이 차지한 발효식물에는 부패균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고, 병원균도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만일 이 균형이 무너진다면 장에 유산균 저장창고를 가진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병원균의 침습으로 인해 살아남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즐기는 알코올이나 항생제도 세균이나 곰팡이가 서로 강자가 되기 위해 내놓는 무기이다. 단지 차이라면 동물처럼 손과 발을 이용해 직접 싸울 수 없다는 것뿐이다.

 세상이 이 같은 원리에 의해서만 돌아간다면 정말 살고 싶지 않게 돼 버릴 것이고, 날마다 스트레스에 시달려 살아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이라는 이 법칙이 알고 보면 광대한 생물현상 중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에 우린 안심하고 생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치 이 용어가 생물의 전부인 양 수시로 사용하지 말길 당부드린다.

 이렇게 반론이 가능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우선 동물들의 새끼 키우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새끼들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약자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약육강식이라면 예외 없이 새끼들이 치이고 먹히고 해야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엄격한 위계사회인 원숭이 사회 새끼들은 우두머리의 머리를 밟고서 먹이를 맨 먼저 볼에 잔뜩 집어넣어도 결코 제재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그 새끼를 한 번 안아보려고 서로 싸움을 벌이기조차 한다. 동종 간에 그런 모습이야 자기들 새끼니 그렇겠지 하겠지만 이종을 섞어놓아도 보통 새끼나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어미는 집단 보호를 받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러 초식동물들이 섞여 사는 초식동물사에서 흑염소 새끼 한 마리가 치열한 전쟁터인 먹이통 한가운데 태연히 누워 자는 모습은, 전쟁터에 피어난 한 떨기 장미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보통 단독생활을 영위한다는 호랑이나 표범들의 경우 사파리 내에 그렇게 많은 수를 섞어놓아도 예상외로 평화롭다. 심지어 이종 간의 사랑으로 라이거나 타이곤 같은 이종의 핏줄이 섞인 새끼를 생산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것도 약육강식과는 어긋난 예들이다. 우리 동물원에서도 형제 중 유난히 작고 병약한 막내 동생을 둔 호랑이 그룹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아픈 동물들은 성질도 사나워져서 먹잇감이 들어오면 이 막냇 동생이 다른 형제들은 얼씬도 못 하게 으르렁 거렸다. 그러면 형제들은 모른 척 하고 슬슬 피해주는 척을 했다. 그러다 그 동생이 질병 말기에 이르자 어느 날 보다 못한 형제들이 그의 숨을 끊어주었는데, 필자는 이것을 안락사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예를 보았을 때 에누리 없는 식물이나 미생물들보다 동물계에서 약육강식과는 동떨어진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생물 교과서에서 비판 없이 사용되고 있는 호전적인 이 같은 용어들을 이제 한 번 되돌아볼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미 진화론도 상당 부분 수정이 불가피하고, 어차피 생물현상이라는 것은 학자들의 이론만으로 규정짓기에 너무나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생물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고로 이런 용어들도 끊임없이 수정이 가해져야 옳다.

최종욱 <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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