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역~전남대 사거리 구간 `1014푸드시스템’ 건물앞에 세워진 `태봉산 유래비’
북구 신안동에는 태봉초등학교와 태봉파출소가 있다.
이처럼 각각의 기관 앞에 태봉이란 지명이 붙은 이유는 지금은 사라진 태봉산(胎封山)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의 태를 묻은 산’이란 뜻을 지닌 이 태봉산은 꽤 오래 전부터 알려졌었다. 1870년대에 그려진 <광주지도>에도 이 태봉산이 나온다. 주변의 산보다 자못 웅장하게 그려놓고는 `고려왕자의 태봉’이란 설명을 보탰다. 누군가의 태봉임에는 틀림없지만 확실히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1928년에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 해 여름 광주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우리 관습에 무덤을 써서는 안 되는 몇 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태봉이었다. 태봉에 무덤을 쓰면 가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신안동 태봉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이를 안 주민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호미를 들고 태봉에 올라 암장한 무덤을 파헤치는 이른바 `파묘소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흥분한 주민들의 손에 쥔 호미 끝에서 뭔가 돌이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고 이를 들춰내자 계란처럼 생긴 커다란 태실(胎室)이 나왔다. 그 안에는 태를 담은 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담은 지석(誌石)도 있었다.
지석에 적힌 글귀에 의하면 아이는 1624년 9월 인조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저 아지대군(兒只大君)이라 적혀 있었는데 이 말은 궁중말로 `아기씨 대군’이란 뜻으로 읽힌다.
또 태를 묻은 시기도 이상했다. 태어난 지 7개월 뒤인 이듬해 9월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렵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충청도 공주로 내려와 있는 급박한 상황이라 태를 제 때에 묻을 시기를 놓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규장각에 있는 <태봉실록>이란 책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5개월, 여자아이는 3개월 뒤에 태를 묻는다고 했다. 따라서 이 남자아이는 조금 시일이 걸리긴 했지만 이 기록이나 다른 사례들로 보아 거의 정상적인 방식으로 태를 묻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봉산이 과연 명당이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삼류 풍수가라도 명당이라면 주변의 지맥(地脈)과 이어진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쯤은 안다. 하지만 신안동 태봉산은 경양방죽 아래 넓은 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북쪽으로 지금의 전남대가 들어선 산줄기가 있지만 그것도 경양방죽에서 신안동 쪽으로 내려오는 개천으로 잘린 모양새다(이 개천은 지금은 복개되어 `경양천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아무튼 아무리 따져봐도 이곳이 명당이라고 볼 만한 정황은 없다. 하지만 옛 기록이 우리에게 그 이유를 들려준다.
<현종개수실록>에 의하면, `들 한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골라 그 꼭대기에 태실을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습’이라고 했다. 신안동 태봉산이 딱 그런 위치다. 또한 <태봉등록>에도 `태봉은 산과 맥이 이어지지 않는 곳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이를 위한 명당과 산 사람의 태를 묻는 길지(吉地)는 위치나 생김새가 다르다는 점을 말해준다.
태봉산은 1960년대 중반에 허물어졌다. 경양방죽을 매립하는 데 필요한 흙을 충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경양방죽과 태봉산이 사라진 것은 문화도시 광주의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됐다.
다만 그곳에서 나온 태실은 광주민속박물관 앞에, 그밖의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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