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철 농업용수로 충분했을까?

▲ 경양방죽. 1차 매립 후에 저수지는 유원지로 이용됐다.

 “석양녘 오렌지 빛의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구절이다. 동시에 필자에겐 일종의 경구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다. 매번 필자가 전해주는 옛날 얘기들이 혹여 광주의 과거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것을 심어주는 건 아닌지 자문할 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사라져간 것은 아쉽고 안타까워 실제보다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과거도 당시엔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우리가 지금 겪는 현실의 무게보다 특별히 더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은 20세기 중반에 사라진 경양방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양방죽은 누가 굴착했을까?

 

 잘 아는 것처럼 경양방죽은 동구 계림동 홈플러스(구 시청) 일대에 있었던 저수지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이 저수지의 면적은 최대 6만6000평이었고 저수지에 물이 가득 했을 때는 광주고 앞까지 차올랐다. 그러던 저수지는 30년대 중반 4만6000평이 매립됐고 이후 60년대 말엽 남은 1만 평마저 전부 매립되면서 사라졌다.

 그런데 경양방죽의 매립과정만큼 이 저수지가 생긴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물론 ‘김방’이란 사람의 지휘로 이 저수지가 굴착됐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전설이 오롯이 사실의 전부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김방을 경양방죽의 굴착자라고 하는 전설이 오늘날처럼 널리 유포된 데는 1968년 김홍삼 씨가 펴낸 ‘경양방죽의 역사’란 책의 영향이 켰다.

 물론 전설에도 사실의 일부는 담겨있다. 김방은 조선 초엽인 1400년대 실존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엔 그가 전북 김제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유명한 벽골제 공사를 완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그의 지휘로 경양방죽을 굴착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1530년대 광주의 문물을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 거대한 호수에 대한 언급 자체는 쏙 빠져 있다. 그보다 훨씬 작은 저수지들은 소개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김방이 이 저수지를 굴착했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는 입장이다. 아마도 벽골제 공사에서 보여준 김방의 능력이 경양방죽과 중첩되면서 이런 전설이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것이 실제 경양방죽의 굴착자가 김방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경양방죽 유래담 중엔 김방 외에 다른 사람, 이를테면 ‘박씨’등이 굴착자로 등장하는 버전도 있다.

 

 방죽 깊이는?…가뭄 대처 능력 의문

 

 또 하나의 의문점은 이 저수지가 항상 농부들을 든든한‘배경’이 되어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서 다뤘듯 태봉산의 실체가 밝혀진 계기는 1928년 그 일대인 옛 태봉리와 신안리에 닥친 가뭄이었다. 그런데 태봉리나 신안리는 경양방죽 아래에 위치한 마을들이다. 경양방죽이 ‘정상적으로’으로 기능했더라면 가뭄은 쉽게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양방죽 아래엔 예로부터 가뭄이 자주 들었고 그래서 이 일대엔 그 위쪽만큼 큰 마을이 없었다.

 더구나 경양방죽의 저수능력은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일부 현대기록엔 경양방죽의 수심이 3.6미터였다고 소개하지만 30년대 자료엔 불과 1미터 남짓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매립 전의 사진 중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찬 모습을 촬영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저수지가 바닥를 죄다 드러난 것도 많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1920년대 경양방죽 최대의 수원이던 광주천와 저수지 사이를 잇는 물길이 모두 하수구로 바뀐 결과였을 것이다. 하수구는 대개 광주천보다 높게 설치된 까닭에 어지간해서는 광주천물이 경양방죽까지 도달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저수지 아래 400헥타르의 논이 방죽 대신에 하늘만 쳐다봐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석양녘 황홀한 풍경’이라는 환상

 

 그러나 경양방죽이 그보다 앞서 제기능을 못했던 정황도 있다. 광주천은 이 방죽의 최대 수원이었지만 그 자체가 우기와 건기에 심한 수위 변화를 보이는 하천이었다. 물론 광주천 외에도 방죽으로 유입되는 작은 개울들이 많았다. 지금은 대개 이름이 잊힌 개울들이지만 그중엔 동계천도 있었고 나무전거리를 따라 흐르던 개천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개울의 기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동계천만 해도 옛 동계리 동쪽의 무등산에서 흘러왔지만 개울을 따라 흘러온 것은 물뿐 아니라 당시 민둥산에 가까웠던 무등산의 흙과 모래도 있었다. 그래서 1900년대 이를 본 일본인들은 동계천을 들판 사이를 가로질러 놓인 철둑길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즉, 오랜 퇴적으로 개울 바닥이 주변 농경지보다 높은 천정천을 이뤘던 셈이다.

 사정이 이러했던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분명한 것은 경양방죽이 모내기철처럼 농업용수가 절실히 요구됐던 시기에 간혹 농부들의 든든한 벗이 돼주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런 사실은 우리가 아는 옛 얘기들이 항상 ‘석양녘의 황홀한 풍경’으로만 기억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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