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정충신, 장계들고 2000리 길
길 이름에 스며있는 역사 공유하자

 지난 10월 광주 서구의회 임시회에 조례안(서구 역사문화 발굴 보급에 관한 조례)을 올린바 있다. 주요 요지는 광주의 중심인 서구에 분포돼 있는 향토 유적과 문화재, 역사인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살아있는 향토사로 주민들과 공유하자는 것이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올해부터 국가정책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도로명 주소’사업이었다. 그동안 줄곧 사용되던 마을이나 동주소가 도로주소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새삼 광주의 주요도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매일 오가는 많은 도로마다 고유한 광주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이름이 어떤 유래로 지어졌는지 모른 채 다녔으니 말이다. 더욱이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음에도 중·고교 시절에 우리 고장의 향토 역사에 대해선 배운 적도, 가르친 적도 없다고 생각하니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세계사나 국사는 열심히 외웠으면서 정작 내 고장의 역사나 역사적 위인들에 대해선 무식하게 보냈다는 뒤늦은 반성이었다.

 

 역사학자 서재 속 자료를 시민들에게

 그래서 우선 광주의 주요 도로 이름에 깃든 역사적 유래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광주시청의 홈페이지를 뒤져도 없었다. 여기저기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찾다보니 향토사에 관심을 둔 민간인이 올려놓은 자료들이 조금 있었다. 참 반가웠다. 고마웠다. 물론 문화원이나 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들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전문가나 학자들의 서적이나 논문, 자료집으로 서고에 잠자고 있을 뿐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하면서 우리 동네, 우리 고장의 살아있는 자료로 공유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크게 부끄러웠던 것은 광주시의 상징도로인 금남로가 왜 금남로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금남로를 얘기하고, 금남로를 다녔다는 점이었다. 금남로는 이젠 광주의 금남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금남로에서 세계의 금남로로 알려지게 되었다. 5·18 민중항쟁의 중심지로서 올해 5·18기록물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금남로의 역사적 유래를 알고 보니 역시 금남로가 범상치 않은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정신이 깃들어 있다.

 금남로는 이 고장 출신 정충신 장군(1576-1636)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정충신은 무등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전해오는 설화에는 정충신의 아버지가 무등산 호랑이를 품는 꿈을 꾸고 낳았다한다. 어려서부터 용맹했다는 이야기다. 정충신이 그 용맹함을 나타낸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정충신은 열아홉 살 나이로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 장군의 부대에서 졸병으로 참전 중이었다. 전라도를 제외하고는 전 국토가 왜군에 유린당한 채 임금(선조)은 벌써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피난 간 상태였다. 사령관인 권율 장군이 임금에게 전황 보고서를 올려야 하나 사방이 왜군에게 막혀있으니 막막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나서서 2000리 길 의주까지 가겠다는 장졸도 찾기 힘들었다. 이때 손을 들고 나선 이가 바로 19세 정충신이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장계)이니 여기엔 군사비밀도 들어있어 왜군에 잡히면 참으로 큰 일이었다. 하지만 정충신은 충성과 지혜로 2000리 길을 달려 마침내 장계를 선조에게 올린다. 그 과정은 오늘날로 보면 가히 대하드라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충신은 온몸에 옻칠을 해서 피부가 짓 물린 나병환자(문둥병자) 행세를 하며 적진을 돌파하기도 했다.

 

 병판 이항복, 정충신 공부시켜 장수로

 평안도 의주에서 정충신의 보고서를 받아본 병조판서 이항복은 깜짝 놀랐다. 믿어지지 않는 정충신의 2000리 돌파기를 듣고 이항복은 정충신의 충성과 지혜, 담대함에 탄복하고 일개 사병인 정충신을 아들처럼 여기고 공부를 시켜 무과에 합격케 한다. 정충신은 이항복이 죽자 아들처럼 3년 간 상주역할을 함으로써 은인에 대한 의리와 도리를 다해 그 이름을 향기롭게 했다.

 정충신은 그 뒤 장군으로 뛰어난 무공을 세웠고, 인조 때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 특히 병조호란 직전에는 청나라로 사신이 되어 전쟁을 막기 위해 애썼던 일화가 그의 담대함과 충심, 지혜를 일깨워준다. 모두가 오랑캐라며 가기를 꺼리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청 황제와 말로서 일전을 벌인다. 청 황제가 ‘어찌 너 같은 소인을 사신으로 보내느냐’며 화를 내자 ‘예의를 갖춘 나라에는 대인을 사신으로 보내나 예의 없는 나라에는 소인을 사신으로 보낸다.’며 대꾸한다. 또 청 황제가 ‘조선은 어찌 나를 도적이라 부르냐?’며 화를 내자 ‘천하를 훔치는 것 보다 더 큰 도적이 어디 있느냐’고 응수하니 청 황제도 그 담대함에 크게 흡족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정충신의 화평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정충신은 아쉽게도 병자호란 직전에 죽고 만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생전에 금남군(錦南君)이라는 군호를 내렸고, 사후에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금남로는 바로 정충신의 군호에서 따온 이름인 것이다. 정충신-금남로-5·18로로 이어지는 역사의 맥을 집다보면 광주의 정신이 흐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외적에 대항하던 의병의 고장이고, 불의에 떨쳐나섰던 저항의 역사, 끈질기고 담대한 도전정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많다. 정충신 이름을 기리는 금남로가 있음에도 정충신의 생애와 정신을 재현하고 알리는 광주의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야 정충신의 생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스스로가 다시 부끄러워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머잖아 아시아문화전당이 완공되면 금남로는 새롭게 태어 날 것이다. 5·18유적도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그즈음에 정충신의 동상이라도 금남로 어딘가 세워진다면 광주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정치적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광주의 젊은 세대들에게 담대한 도전을 일깨우는 상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든다.

이병완 www.wanlee.net

이병완님은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박정희의나라, 김대중의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를 썼으며 지금은 광주광역시 서구의원이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