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둘레보다 환하고 그윽하다
정완영 동시조,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조만간 눈이 올 것 같다. 이불 같은 흰 눈이 내리면 어두웠던 마음자리도 잠시 환해질까. 입었던 옷을 다 벗고 넓은 하늘을 입고 섰는 겨울나무처럼 욕심없이 꿈을 가꿀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굽은 길은 하늘이 만든 길이고, 곧은 길은 사람이 만든 길’이라 했으니 하늘이 만든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사람사는 도리를, 자연의 순리를 생각해보는 좋은 계절이다.

 아흔을 넘긴 할아버지 시인이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아갈 어린 벗들에게 보내는 선물 보따리를 푼다. 정완영 시인의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을 한 장씩 읽어가노라면 잘 익은 알밤처럼 오돌오돌 맛나고 씹을수록 고소하다. 입 안에 고이는 찰랑찰랑 맑은 소리, 마음에 차오르는 살랑살랑 고운 심상. 초록빛 실타래 같은 봄비에 젖었다가, 하늘 길목에 내걸린 등불처럼 환해졌다가, 바람결 좋은 날 머리 빗고 섰는 나무가 되었다가, 오소소 추워서 씨방 속에 숨은 꽃씨가 되어보는 경험을 어디서 해볼 수 있을런지….

 “다섯 살 우리 아기 앞니 빠져 내리듯이 /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쏙쏙 빠져 내립니다 / 사비약 사비약 하며 사비약눈 내립니다.”(`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전문) “별들은 등불을 끄고 하늘 속에 꼭꼭 숨고 / 눈을 등불을 켜 들고 밤새도록 내리는데 / 우리는 한 이불 속에서 호끈호끈 잠이 듭니다.” (`눈 내리는 밤’ 전문)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아니라 아이들 이가 빠지듯이 한 잎 두 잎 내리는 첫눈을 뜻하는 사비약눈, 호끈호끈 잠이 든다는 실감나는 표현들. “할아버지 보거나 말거나 혼자 도는 텔레비전 / 텔레비전 돌거나 말거나 코를 고는 할아버지 / 시계는 초저녁인데 우리 집은 한밤중 // 텔레비전 방방 울려야 잠을 자는 할아버지 / 할아버지 자거나 말거나 혼자 신난 텔레비전 / 시계는 오밤중인데 우리 집은 초저녁.” (`텔레비전’ 전문) 언어가 춤을 추고, 떼굴떼굴 구르고, 사뿐사뿐 날아가는 것만 같다.

 “내가 사는 석촌 호수 / 밤이 자꾸 깊어 가면 // 불빛도 물속에 들어가 / 잠자리를 본답니다.// 가끔은 흔들립니다. / 아마 꿈을 꾸나 봐요.” (`꿈을 꾸나 봐요’ 전문) 이렇게 시인은 맑은 상상력으로 흔하디흔한 것들을 따스하고 지극하게 바라본다. 살아온 날만큼 깊은 시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늘도 호수도 나무도 사람도, 욕심 없이 서로를 바라봐준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듯이>를 펴낼 만큼 어린이들을 위한 시조쓰기에 노력했던 정완영 시인은 “옛날 밤을 새워가면서 잣던 할머니의 물레질, 한 번 뽑고(초장) 두 번 뽑고(중장), 세 번째는 어깨 너머로 휘끈 실을 뽑아넘겨 두루룩 꼬투마리에 힘껏 감아주던 것(종장)”이 시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45자 내외가 너무 적어 자신의 생각을 다 담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삼라만상을 다 담고도 남을 정도로 큰 그릇”이라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 /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하다. // 울고 있는 뻐꾸기에게, 누워 있는 감꽃에게 / 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 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하다.” (`감꽃’ 전문)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시의 언어들, 감꽃 둘레보다 환하고 그윽하다.

정봉남 <아이숲어린이도서관장>

 정봉남님은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우는 사람입니다. 아이가 주인 되는 영토를 만들기 위해 뚜벅뚜벅 오래 걸었고, 결국 아이가 주인인 `아이숲어린이도서관’을 엄마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의 꿈은 아이들의 꿈속에 고래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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