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배신, 인권은 웃음거리 전락
사회주의 라오스에서도 `정의’ 주제 워크숍은 성황
불의 못 참는 `의향’ 면면에 정의도시 논리 배어 있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여행, 그리고 현지 단체나 전 세계 비정부 단체 중 특히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함양하기 위한 단체와 일해본 경험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는 기회가 돼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내가 다니는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는 현재의 한국보다 경제적·정치적인 상황이 열악하다. 오랫동안의 절대 왕정과 식민제국주의자들의 탄압과 착취의 굴레를 벗고, 독립이 되면 내전을 겪으며, 이어 식민제국주의자들이 수탈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제반 사회시설이 파괴되고 극빈을 겪는 절차를 밟는다.

 다음은 극빈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반민주·반인륜적인 민간독재 또는 군사독재를 통칭하는 개발독재기간을 거치는데, 이것이 오직 동남아 국가들만의 이야기일까? 한국도 이러한 악순환의 굴레를 똑같이 겪었다. 다만 그들과 달리 조금 일찍 그 굴레를 벗어난 것일 뿐.

 이러한 나라 국민이 공통으로 목말라 하는 게 자유 인권 정의 민주주의 등이다.

 짐승들이 사는 정글이 아니라 인간들이 얽혀 사는 공동체에 없어선 안 될 귀중한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경험한 한국인들은 그것들을 쟁취의 결과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말을 하기가 거북스럽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 자기들과 대척 관계에 있는 나라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너무 자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난 부시 정권 8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하고 강점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이야말로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주의적 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라크 내 교도소와 세계의 테러 용의자들을 국제법을 어기고 강제 수용한 관타나모 해병기지 내 수용소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반인권적인 행태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은 급기야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는 시민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수호천사가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귀중한 가치들을 정치적 꼼수로 이용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말만 나오면 긴장하던 전체주의 국가들의 역공이 시작된 건 오래되었지만, 이제는 아예 비웃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는 너는? 하하…”

 소위 제 3세계인들에게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상징적인 국가로 인식돼온 미국이 더는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이제 인권이라는 것 자체가 거북스러운 말로 전락하고 있다. 미국 따라 하기 위해 복창에 복창을 거듭하던 나라들도 인권이라는 말 대신 `정의’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주 필자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치엔에서 열린 `정의’ 주제 워크숍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공산당 일당 체제하에 있는 라오스에서 정부의 한 축인 법무부 관리(즉 현직 판·검사, 법 집행관인 경찰 고위 간부, 군 고위 법무팀)를 상대로 `정의의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 되는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 워크숍에서 필자는 똑똑히 보았다.

 만일 이들에게 민주주의나 인권의 주제로 워크숍을 했다면 그렇게 편안한 분위기였을까? 사실상 정의의 시스템이 튼튼히 정착한 사회라면 인권은 자연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고, 어차피 이러한 가치들을 담아낼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그 게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비록 민주주의가 만사형통의 완전한 시스템은 아닐지라도, 그나마 이것보다 더 나은 체제는 아직 없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5·18을 기점으로 태동한 광주의 `인권도시’ 라는 이미지가 다른 이질권 문화에도 편안하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해 고뇌할 때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5·18도 깊이있게 들여다보면 정의로 규정될 수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남대 앞에서 평화롭게 시위하던 학생들에게 가해진 공수부대 군인들의 반인륜적이고 천인공노할 탄압 과정을 목격하고 투쟁에 나선 광주시민, 이들의 분노는 인간의 존엄성 훼손을 더는 좌시할 수 없었던 정의의 표출이다.

 광주는 또한 5·18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의향(義鄕)으로 불리던 고장이다. 의향이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고장이요, 이는 바로 정의로운 고장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만일 광주를 `인권의 도시(City of Human Rights)’보다 `정의의 도시(City of Justice)’로 부를 수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편안하게 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광주시에서 매년 치르는 5월 행사 기간에 아시아 국가들에 있는 도시를 선발해 그 곳의 시장을 초청할 때를 생각해보자. 예컨대 베트남의 하노이 시장이나 미얀마의 랭군 시장을 초청한다고 했을 때다.

 하나는 공산당 일당 체제하에 있는 나라요, 또 하나는 철옹성 같은 군부독재가 체제를 운영하는 나라다. 그들에게 `City of Human Rights’ 광주로 초대하겠다는 초청장을 발송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City of Justice’인 광주로 모시겠다는 초청장을 보낼 때는 한결 수월할 것 아니겠는가?

 이질문화권에 접근할 때는 국제적인 프로토콜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실체를 파악해 전략적인 접근법을 수립하는 것이 기본이다.

 세상은 항상 변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에 대한 체제 운영자들의 유연성을 기대해본다.

프놈펜에서=서유진 서유진 eeugenesoh@gmail.com


서유진 님은 10여 년 동안 정글을 누비고 다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스리랑카·인도·태국·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민중에게 5·18광주항쟁의 역사와 가치를 전파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진 10년 간이 그가 `5·18의 아시아 전도사’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기간이다. 현재도 동남아에 머물며 각 나라의 민중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