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앙망한다. 아마도 역사이래 그리 믿는(믿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게 분명하다. `영생’을 믿기 위해서 입에 침을 튀어가며 `영혼’을 이야기 한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무엇일진대 만약 영혼이 없다면 영생 또한 무색한 거짓부렁이 될 터이니 진위 여부를 떠나 수많은 전설들이 먼저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다. 다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추모공원이나 한적한 묏등을 거니는 발걸음들을 보라. 아니면 병원 장례식장 근처라도 산보하는 행인들은 너나없이 허망한 삶을 안타까워하며 영원한 삶을 잠깐이나마 희구하게 되어있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춥고 쓸쓸한 죽음이 두렵고, 처지가 원망스럽기조차 할 것이다.

 오늘도 정치권은 태초부터 그랬다는 모양새로 으르렁거리고, 남북은 총부리를 겨누면서 드잡이질임에 여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삶이 별떨기처럼 뚝 떨어지는 일, 죽음의 엽서가 우편함마다 꽂히는 일은 일상다반사. 남녘에선 큰 스승 리영희 선생의 뒤를 이어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이 떠났고, 북녘에선 백석이 노래하던 `눈이 푹푹 나리던 날’ 그들 인민의 지도자 동지가 운명을 달리했다. 금수산 구중궁궐에 이집트 신전의 미라처럼 시신을 보존한단들 죽은 이가 다시 살아 돌아오지도 않을 텐데…죽은 자들을 위한 세상은 신에 의해 따로 각별히 마련되어 있다고들 한다. 이승은 앞서간 수많은 귀신 유령과 더불어 살기에는 비좁은 울타리다.

 

 `거짓 정의’뒷주머니에 제 이권만 가득

 죽음이란 운명은 심지어 신들에게 조차 예외가 없더라. 아폴론과 요정 클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파에톤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이륜마차를 몰다가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격노한 제우스의 번개를 맞고 떨어져 죽은 파에톤을 위하여 물의 요정들이 이렇게 묘비를 세워주었다. “아폴론의 이륜마차를 타고 몰던 파에톤. 제우스의 번갯불을 맞아 여기 잠들다. 아버지처럼 이륜마차를 잘 몰지는 못했지만 기상만큼은 뛰어났도다!” 파에톤의 누이들은 이후 굵은 눈물방울을 닮은 잎사귀를 펄럭거리는 포플러나무가 되었고, 오빠를 위해 흘린 눈물은 강물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호박이 되었다고 한다.

 절반은 신의 위용, 다른 반쪽은 참사람으로 흠숭되고 있는 예수님 또한 죽음과 떠남(승천) 앞에 예외가 아니었다. 기념비로 삼고자 예수님의 시신을 세대에 걸쳐 운반하고, 부활 소생시켜 제국의 종교시스템에 접목 안착시킨 로마인들, 친로마계 인사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민중들에게 헌금 거래를 통한 내세와 구원이라는 공식을 세뇌시키고, 현실 부정과 부적응을 열성 신앙으로 착각하게 만들며, 부당한 처우에 적응하게 만들어 능수능란 수족으로 부리면서 철저한 착취와 유린을 일삼아왔다. 사악한 제국에 뜨겁게 항쟁하며 싸우지 못하도록 `유연함’ `성숙함’이라는 주문을 수시로 걸고, `머잖아’라는 설탕물을 먹이고, `언젠가’라는 단계론으로 꼬드기면서 거짓 사랑, 거짓 평화, 거짓 정의, 거짓 희망, 거짓 기적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차리고, 눈여겨 그들 뒷주머니를 살펴보면 자기 이권, 자기 밥벌이, 제 가족 부양에만 집중하는 1%들임이 금방 들통나고 만다. 지금도 99%의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던 예수님과 딴판으로 십자군의 장교들인 이네들이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계시, 신탁,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고, 세상을 또 얼마나 어지럽히고 있는가들.

 저 무수한 붉은 네온사인의 보태기인 십자가, 탐욕의 수학공식은 그들의 양보못할 슬로건이요 뻔뻔하고 사악한 진실게임의 물증이 분명하렷다. 대개 그들의 기도는 남들보다 더 달라는 것이고, 더 채워주라는 말 뿐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은 그나마 밤중에 전원 버튼을 끄고, 초승달과 고요히 잠이라도 잘 것이다.

 

 `참사람’이 귀하니 애가 녹는다

 죽은 뒤 제아무리 영화로운 복권 복원이 있다고 치더라도 죽은 사람은 예외 없이 잊히고 지워지는 게 마땅하다. 잊힐까 두려워 급조해낸 치장과 기념비들은 대체로 안쓰러운 몰골들이다. 어긋나고 버성겨 보일 뿐인 오일팔 신묘역처럼 생뚱스럽고 괜한 허세만 같아 보인다. 필시 망자들은 오히려 구묘역을 휘파람을 불며 떠돌고 있을 것이다. 도처에 세워지기 바쁜 관변 시인들의 시비들 또한 민중의 입술에 남지 않는다면 모두 허망한 `돌 장난’에 불과한 일. 지금, 오늘의 삶과 투쟁을 끝내고 죽어간 이들에겐 평안한 안식만이 최고의 선물일 테고, 남겨진 우리에겐 정신의 계승과 발전만이 유일무이 과제이며 사명이리라.

 오늘 우리에겐 모든 날들이 사실 그날의 뜨거운 오월 어느 날이다. 가난한 이들은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오일이 그 해 5월 18일처럼 참람하고 신산하며 우울한 총성의 연발이다. 미취업, 정리해고는 창검보다 무섭게 우리들을 살육하고 있다. 꽃잎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은 번화가 횡단보도에 깔려들 있다. 그날처럼 분기탱천하여 우리가 점령해야할, 우리의 함성으로 물들여야 할 광장은 이제 돈줄 밝은 공공예술가들의 놀이터에 불과한 모양새다. 뿐만인가. 우리들이 당장 찾아가야 할 5·18 묘역은 경쟁과 자본과 친자본 권력에 숨져가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 농민들, 학생들, 가난한 99%의 서러운 무덤들이 아니런가. 오늘도 누군가 슬픈 주검이 무덤에 눕고 있을 것이리라. 포플러나무가 찬바람에 우는데, 호박이 떠내려가는 강물은 저리도 분노하는데, 참사람은 광장에 너무도 드물게 목격되고 있으니 애가 다 녹는다.

임의진<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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