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구 찾는 자본주의 노예들

▲ 라오스 `방비엥’ 입구.

 “어둡고 칙칙하고 추운 이곳에서 어서 뛰쳐나와 성님한테 갈 생각을 하니 흥분돼 잠이 안올 지경입니다.”

 독일에서 20여 년 동안 전업 화가 활동을 하며 독일 화단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목포 출신 홍성담 화백의 후배이기도 한 그는 오래 전부터 내가 헤매고 있는 인도차이나 지역을 여행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올해 이곳에 올 비행기표를 끊고 보낸 메일이 이렇게 시작했다.

 “하하. 어둡고 칙칙하고 추운, 우리는 그 곳을 얼마나 동경했었는가? 빵도 자유도 없었던 시절 뉴욕·런던·파리는 우리의 탈출구 아니였던가?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결국 못볼 것을 보고 말았지, 안 그런가?”

 “The life should be like this in the begin with and oh! I really love this place.” `애시당초 삶이 이래야 하는건데. 오! 정말 이곳이 좋다’며 영국에서 온 젊은 남녀 여행객이 길거리 카페에서 시원한 것을 마신다. 바로 어둡고 칙칙하고 추운 곳을 빠져나온 친구들이다.

 나는 미국에서 실컷 보았고 그는 독일에서 실컷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나 나나 어렵게 그 곳에 갔던 사람들 같이 공부해서 학위 받고 바로 귀국했더라면, 결코 그나 내가 본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 20년 살았는데 신물이 난다고 했다. 겉과 속이 다른 그들과 부대끼며 오랜 산 탓이다.

 미국에서는 주로 미국인만 독일에서는 주로 독일인 하고 생활하며 그들 생활의 단면을 보겠지만, 현재 동남아 지역은 서구인으로 들끓고 있다. 서구인이 제일 선호하는 여행지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이 지역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중반부터 서구인의 `아시아 러시’가 시작됐고, 서구의 경제 전망이 불투명해진 근래엔 거의 `웨이브’라는 말을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몰려오고 있다.

 필자는 2000년 중반부터 `아시아는 21세기 중반에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 축이 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생각보다 그날이 더 빨리 다가오는 것 같다.

 중심축 운운 배경은 간단하다. 바로 세계 인구의 1/3이 몰려 있고 사실상 자연자원이 풍부하다는, 즉 인적자원과 자연자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그리고 옛날처럼 서구의 강국들이 무력으로 식민지화할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암튼 여기는 현지인은 물론 거의 모든 서구인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고, 그들 삶의 단면을 체험할 수 있는, 아마 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필자는 틈만 나면 한국의 또는 광주의 젊은이들을 이곳에 오게 하는데, 그들로 하여금 이곳을 `세계의 창’으로 보게 하려는 생각에서다.

 서구인이 이곳에 와서 해방감을 느끼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자명하다. 고도의 문명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그들은 그러한 사회에 걸맞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사실상 일의 노예나 다름없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돈 몇푼이면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으로 끼니를 떼울 수 있다. 게다가 날씨는 환상적이고, 무엇보다 매사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영국에서 온 젊은이가 `삶이란 원래 이래야 되는건데, 원~’하고 영국에서의 삶을 떠올린 것 아니겠는가? 서구도 근래 경제난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걱정이 태산이다. 마치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인들이 토하듯 `정말이지 죽지 못해 삽니다’하는 식이다.

 인간은 어느 족속에 속하든 행복하길 원한다. 라오스에 가면 아직도 잠자고 있는 듯한 나라, 그리고 사람들의 순박함을 만난다. 라오스에서 나보다 나쁜 놈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도 곧 돈 맛을 알게되면 한국과 같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외지 사람들이 그 청정함을 즐기려 몰려들텐데…. 발바닥에 그들이 묻히고 들어올 탐욕과 술·마약·섹스의 범람이 현지인들에 미칠 영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살다가 한 번씩 풀어지는 건 정신 건강에도 좋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충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현지인의 정서나 문화를 배려하지 않는 오만방자한 서구인의 모습을 보면 같은 동양인으로서 은근히 뿔이 난다.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젊은 배낭객들이 몰리는 곳에 가면 그런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현지인인들 고깝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자기 마을에 떨어뜨리고 가는 달러 때문에 분노를 억제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인지라 현지 젊은이들이 서구의 못된 면에 오염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그럴 위험이 큰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라오스의 `방 비엥’이 그 중 하나라고 답한다.

 병풍처럼 서 있는 석회암 산을 끼고, 건기에는 지리산 계곡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남송강’이 있다. 건기에는 물이 얕고 유속이 빠르지 않아 동남아 여행 젊은 배낭객들에게 튜빙센터(tubing center)로 알려진 라오스의 산간 마을이다.

 마을에서 7~8km 떨어진 강 상류로 올라가 튜브를 타고 내려오면서 강가에 있는 바에 들러 술을 마실 수 있다. 아예 맥주나 와인을 병째 들고 튜브에 올라 내려오는 내내 마시며 마을에 도착할 때쯤에는 거의 만취한다. 바다도 없는 나라, 그것도 산간 내륙마을이 비치 타운으로 바뀐다. 강에서 올라온 차림 그대로 동네 한가운데를 비틀거리며 깔깔대는 그들은 현지인들의 큰 구경거리다.

 사내들은 수영 팬티 하나, 여자들은 실오라기 같은 비키니(사실은 그들 몸 95%는 노출) 상태로 만취해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한다. 한마디로 개판 그 자체다.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자본주의를 극대화하던 핵심 국가로 거들먹거리던 그들이 마치 이 곳을 `해방구’로 생각하는 듯하다. 자기 나라에서 살땐 자본의 노예가 돼, 그들이 누려야 할 자유나 민주주의를 즐기지 못하다가 이 곳에서 쌩 지랄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이들에겐 맞지 않다.

 집에 돌아간다고 할 때 열에 아홉은 신나는 게 아니라 한결같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돈이 넉넉지 않아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여행을 해도 이곳은 1% 들이 운영하는 곳보다 그렇게 혹독하지 않다. 바닥을 기여도 무릎팍이 까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지금도 젊은이 10명에게 `미국이나 유럽 갈래?’ `동남아 갈래?’ 물으면 8~9명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아직도 그곳에 가면 뭔가 베낄 게 있다는 생각 때문 아니겠는가? 그래 많이들 가서 열심히 베껴들 보소.

태국 북부 산간 마을 `파이’에서=서유진 eeugenes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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